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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선원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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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규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9월 18일 (월) 12:10 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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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선원사지
(江華 禪源寺址)
대표명칭 강화 선원사지
한자 江華 禪源寺址
주소 전남 함평군 해보면 광암리
문화재 지정번호 사적 제259호
문화재 지정일 1977년 11월 29일
관리자 강화군
건립시기 고려시대
창건자 최우



정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에 있는 고려시대의 절터.

내용

선원사는 고려시대에 몽골의 침략을 받아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후 1245년(고종 32) 최우(崔瑀)가 자신의 원찰(願刹)이자 대몽항쟁의 정신적 지주로 삼고자 창건한 곳이다.[1]

강화도 피난 당시 국찰(國刹)의 격을 갖던 사찰이었으며, 역대 주지에 진명국사(眞明國師)·원오국사(圓悟國師)·자오국사(慈悟國師)·원명국사(圓明國師)·굉연선사(宏演禪師) 등 신망 높은 당대 고승들이 임명될 정도로 역할과 중요성이 컸다. 충렬왕 때에는 임시 궁궐로 사용하기도 했다.[2]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여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목판을 조각, 봉안하기도 했다. 이때 조각된 팔만대장경 목판은 현재 합천 해인사(陜川 海印寺)에 봉안되어 있는데 1398년(태조 7) 한양의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1456년경(세조 2) 해인사로 다시 옮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시대의 선원사순천 송광사(順天 松廣寺)와 함께 2대 선찰(禪刹)로 손꼽혔으나 1398년(태조 7) 이후 아무런 기록이 없으며, 그 터는 잊혀져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3]

발굴조사결과

1976년 동국대학교 강화학술조사단에 의해 조사된 선원사지는 당시 보상화문이 새겨진 전돌, 막새기와, '옴마니반메훔'의 범자(梵字)가 새겨진 치미 등의 조각들이 출토되었다. 500 불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4]

1996년부터 4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동국대학교박물관) 결과 건물터, 축대, 배수시설 유구와 연화문 기와, 금동탄생불, 청동나한상, 탄화된 금니사경, 묵서사경 등이 출토되어 절터와 관련된 유적으로 규명되고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에서 전하는 고려 팔만대장경을 판각했던 선원사(禪源寺)터로 볼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가 확인되지 않아 이에 대하여는 장기적인 조사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5]

사역이 크게 네 구역으로 구분되어 층단식(層段式)으로 대지가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며, 남한지역에 현존하는 고려시대 사찰 터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6]

관련문화유산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강화 선원사지 강화 선원사 A는 B의 터이다 A edm:isRelatedTo B
동국대학교박물관 강화 선원사지 A는 B를 발굴조사했다 A edm:isRelatedTo B

시각자료

주석

  1. 손신영, "강화 선원사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7 - 경기남부와 남한강』, 돌배게, 2012. 온라인참조:"선원사터", 답사여행의 길잡이: 경기남부와 남한강,『네이버 지식백과』online.
  3. 손신영, "강화 선원사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7 - 경기남부와 남한강』, 돌배게, 2012. 온라인참조:"선원사터", 답사여행의 길잡이: 경기남부와 남한강,『네이버 지식백과』online.
  5. "강화 선원사지",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6. 손신영, "강화 선원사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손신영, "강화 선원사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7 - 경기남부와 남한강』, 돌배게, 2012. 온라인참조:"선원사터", 답사여행의 길잡이: 경기남부와 남한강,『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강화 선원사지",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강화 선원사지", 『두산백과』on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