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중희당
목차
정의
창덕궁에 있는 동궁의 정전(正殿)이었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는다.[1]
내용
역사
창덕궁 희정당 동쪽에 왕세자를 위해 건립되었다. 창덕궁의 동궁은 원래 창덕궁 건양문 밖에 창덕궁 저승전을 중심으로 창덕궁 시민당을 정당으로 하여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1757년(영조 33)에 창덕궁 낙선당이 화재로 소실되고 뒤이어 1764년(영조 40)에 창덕궁 저승전이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1780년(정조 4) 7월에는 창덕궁 시민당까지 화재로 소실되고 이후로 재건되지 않았다. 1782년 9월 7일에 문효세자가 탄생하자 원자를 위해 창덕궁 중희당을 건립하였다. 창덕궁 중희당은 창덕궁과 창경궁의 중간에 위치하였으며 왕의 편전인 창덕궁 희정당과 대내의 정전인 창덕궁 대조전과 매우 가까웠다. 1785년(정조 9) 8월 창덕궁 중희당의 동남쪽에 창덕궁 수강재(昌德宮 壽康齋)를 건립하였다. 왕의 서재이자 장차 왕세자의 학문과 관련한 장소로 염두에 두고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원자가 3살이 되던 1784년 8월 2일에 창덕궁 중희당에서 원자를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문효세자가 1786년에 죽자 창덕궁 중희당은 동궁으로의 역할을 발휘하지 못하고, 1786년부터 왕의 편전과 같이 신하를 만나 정사를 논하고 강서를 읽는 장소로 주로 사용되었다. 1827년(순조 27)부터 1830년까지 효명세자가 대리청정하는 정당(正堂)으로 사용하였다. 1866년(고종 3)에는 왕비의 초간택 장소로 사용되었다. 헌종은 정침으로 거처하였으며 이곳에서 승하하였다.[2]
현재
1782년(정조 6) 처음 건립될 때, 정면 8간 측면 4간의 32칸이나 되는 건물이었는데, 현재는 왕세자가 볼 책을 보관하던 부속 건물인 창덕궁 승화루(昌德宮 承華樓)를 잇는 복도만 남아 건물이 갑자기 끊겨있는 형태이다. 창덕궁 중희당과 그 동쪽으로 창덕궁 승화루(昌德宮 承華樓)가 있고 창덕궁 승화루로 올라가는 보루(步樓)인 창덕궁 삼삼와(昌德宮 三三窩), 창덕궁 육우정(昌德宮 六隅亭)이 있었다. 현재 창덕궁 중희당은 없으며, 창덕궁 삼삼와와 창덕궁 승화루만 남아 있다.[3]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책례 | 창덕궁 중희당 | A는 B에서 거행하였다 | |
문효세자 | 창덕궁 중희당 | A는 B에서 머물렀다 |
시간정보
시간 | 내용 |
---|---|
1784년 8월 2일 | 문효세자는 창덕궁 중희당에서 책봉례를 거행하였다 |
공간정보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주석
- ↑ 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1999, 277~278쪽.
- ↑ 한국학진흥사업단 중희당
- ↑ 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1999, 277~278쪽.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공준원, 『오궁과 도성』, 세계문예, 2009.
- 이강근, 『한국의 궁궐』, 대원사, 1991.
- 이태호, 『그림으로 본 옛 서울』, 서울학연구소, 1995.
- 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1999.
- 장순용, 『창덕궁』, 대원사,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