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서봉사지
용인 서봉사지 (龍仁 瑞峰寺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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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용인 서봉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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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龍仁 瑞峰寺址 |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 산21 |
경내문화재 | 용인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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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기도 용인시 수지읍 신봉리에 있었던 절.
내용
창건연대 및 창건자는 미상이나 고려시대 국사 현오(玄梧)가 이곳에 주석하면서 국왕을 강학(講學)하였다는 일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절에 대한 역사는 거의 전래되지 않고 있다. 임진왜란 때 절에서 떠내려 오는 쌀뜨물이 10리 나 흘러내렸기 때문에 왜적이 뭍을 따라 올라가서 절을 불태웠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 전라감사 이광(李廣)이 이끄는 근왕병 5만이 이곳에서 왜적과 싸웠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 절에서는 『인천안목(人天眼目)』·『불조삼경(佛祖三經)』 등 10여종의 목판본을 간행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불설예수시왕경(佛說豫修十王經)』은 특출하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1]
『태종실록』 7년에 따르면 용구(龍駒)[용인] 서봉사를 전국적인 자복사(資福寺)의 하나로 선정하고, 천태종 소속으로 삼았다 한다. 또한 조선 전기에 시행된 사찰의 혁파 대상에서 제외된 거찰(巨刹)로서, ‘명찰(名刹)’ 또는 ‘명당 터의 대가람’에 해당하는 절이었다.[2]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관련 기록으로 보아 18세기 후반까지 운영되었고, 19세기경에 폐사(廢寺)된 것으로 추정된다. [3]
이곳이 서봉사임을 알게 된 것은 현오국사탑비의 비각을 건립하는 공사 중 명문와편(銘文瓦片)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사지(寺址)의 크기로 보아 굉장한 규모의 사찰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절은 서북을 등진 동남향으로 배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상·중·하의 계단식으로 나누어져 있다. 맨 위쪽의 절터가 법당자리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주춧돌과 탑재 등도 흩어져 있다. [4]
관련문화유산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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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 | 용인 서봉사지 | A는 B에 있다 | |
종린 | 용인 서봉사지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인천안목 | 용인 서봉사지 | A는 B와 관련있다 | |
천태종 | 용인 서봉사지 | A는 B를 포함한다 |
시각자료
주석
- ↑ "서봉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서봉사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용인 서봉사지",
『두산백과』online . - ↑ "서봉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