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이병철(李秉喆) | |
대표명칭 | 이병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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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李秉喆 |
생몰년 | 1910년-1987년 |
본관 | 경주(慶州) |
호 | 호암(湖巖) |
출생지 | 경남 의령 |
시대 | 현대 |
국적 | 대한민국 |
대표저서 | 『우리가 잘사는 길』,『호암자전』 |
배우자 | 박두을(朴杜乙) |
부 | 이찬우(李纘雨) |
모 | 권재림(權在林) |
자녀 | 이인희,이맹희,이창희,이건희,이명희,이숙희 |
상훈 | 금탑산업훈장, 세계최고경영인상 |
유형 | 기업인 |
목차
정의
오늘날 삼성그룹의 모체인 삼성상회를 설립한 20세기의 대표적 기업인.
내용
학력
1922년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입학, 같은 해 9월서울 수송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학하였다. 중동학교 속성과 1학년에 입학, 중학부에 들어갔다. 1929년 박두을(朴杜乙)과 혼인하였다.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전문부 정경학과에 입학하여 수학중 심한 각기병으로 귀국하게 되어 학업을 중단했다.[1]
사업이력
1936년 마산에서 협동정미소를 세워 사업에 투신한 후, 1938년 3월 자본금 3만 원으로 삼성그룹의 모체인 삼성상회를 설립하였다.
1951년 부산에서 삼성물산을 세워 무역업을 하면서 1953∼1954년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설립, 제조업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사업 영역을 크게 확대해갔으며, 1961년 한국경제인협회(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1964년 동양 라디오 및 텔레비전 방송과 1965년 《중앙일보》를 창설하여 언론사 경영에 참여하였다. 1969년 삼성전자를 설립하여 삼성그룹 육성의 도약대를 만들었다. 1974년 삼성석유화학·삼성중공업을 설립하여 중화학공업에 진출하였고, 이후 용인자연농원·삼성정밀 등을 설립하였다. 1982년 삼성반도체통신을 설립하였다.[2]
사카린 밀수사건
1966년 회장직에 있던 한국비료공업이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논란에 휩싸이자 회사를 국가에 헌납하고 경영 및 각종 언론, 학원 사업에서 손을 뗄 것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70년대 이후 완전히 경영에 복귀하였고, 반도체 산업에 손을 대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대표이력
- 1936 협동정미소 설립
- 1938 삼성상회 설립
- 1961.8~1962.9 제1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 1965 중앙일보 사장
- 1969 삼성전자 설립
- 1974 삼성석유화학 설립
- 1977~1987.11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
- 1982~1987.11 한일경제협회 고문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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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 한국비료공업 | A는 B를 창립하였다 | 1964년 |
한국비료공업 | 롯데정밀화학 | A는 B의 전신이다 | |
이병철 | 사카린 밀수사건 | A는 B를 주도하였다 | 1966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