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 회암사 지공선사부도비
양주 회암사 지공선사부도비 (楊洲 檜巖寺 指空禪師浮屠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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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양주 회암사 지공선사부도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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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Stele for Master Zhikong at Hoeamsa Temple, Yangju |
한자 | 楊洲 檜巖寺 指空禪師浮屠碑 |
주소 |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 8-1 |
문화재 지정번호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5호 |
문화재 지정일 | 2004년 11월 29일 |
찬자 | 이색(李穡) |
서자 | 이희현(李羲玄) |
각자 | 미상 |
서체 | 해서(楷書) |
승려 | 지공(指空) |
건립연대 | 1828년 |
승탑 | 지공선사부도 및 석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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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회암사(檜巖寺)에 있는 인도의 승려 지공(指空, ?-1363)의 탑비.
내용
개요
비신의 높이 237cm, 너비 96cm, 두께 28cm로[1] 네모꼴 받침돌 위에 홈을 파서 비신(碑身)을 세우고 팔작지붕 모양의 옥개석(屋蓋石)을 얹은 형식이다.[2] 탑비 옆에는 귀부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이것이 원래 지공선사부도비의 귀부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ref>양주 회암사 지공선사부도비 안내판 해설문.</ref>
비문
비문에는 지공(指空)이 인도의 108대 조사(祖師)로 황제 등의 우대를 받았으며, 반야(般若)를 공부했다는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3]
탑비의 파손과 복원
지공(指空이 원(元)에서 입적한 것은 1363년 11월이었으며, 1370년에는 그의 유골이 고려에 도착하였다.[4] 이를 계기로, 지공의 제자인 나옹(懶翁)은 회암사(檜巖寺) 중창에 착수하였으며, 지공의 승탑을 세우는 등 중창불사에 힘을 쏟았다.[5] 원래의 비는 이색(李穡)이 비문(碑文)을 짓고 이희현(李羲玄)이 글씨를 써서 1378년(고려 우왕 4) 회암사에 세워졌으나, 1821년(조선 순조 21) 광주의 유생 이응준(李膺俊)에 의해 파괴되어 1828년 다시 건립되었다.<ref>"지공, 나옹선사 부도 및 석등", 회암사지 주변 문화재,
- 이재형, "이재형 기자의 편지로 읽는 스님이야기 - 23. 천축승 지공이 고려 나옹에게", 『법보신문』, 2015년 3월 18일.
- 황원갑, "무학왕사와 천보산 회암사", 『고승과 명찰』, 바움, 2010, 272-292쪽.
"양주 회암사 지공선사 승탑비", 두산백과,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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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갤러리
지공선사부도비와 지공선사부도
주석
- ↑ "회암사지공선사부도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소. - ↑ "지공선사 부도비", 문화재,
『회암사』online . - ↑ "양주 회암사 지공선사 승탑비",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황원갑, "무학왕사와 천보산 회암사", 『고승과 명찰』, 바움, 2010, 286쪽.
- ↑ 이재형, "이재형 기자의 편지로 읽는 스님이야기 - 23. 천축승 지공이 고려 나옹에게", 『법보신문』, 2015년 3월 18일.
참고문헌
- "양주 회암사 지공선사 승탑비",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회암사지공선사부도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소. - 이재형, "이재형 기자의 편지로 읽는 스님이야기 - 23. 천축승 지공이 고려 나옹에게", 『법보신문』, 2015년 3월 18일.
- 황원갑, "무학왕사와 천보산 회암사", 『고승과 명찰』, 바움, 2010, 272-29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