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 회암사
양주 회암사 (楊州 檜巖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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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양주 회암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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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楊州 檜巖寺 |
주소 |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14 |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제 128호 |
문화재 지정일 | 1964년 6월 10일 |
건립시기 | 1328년(충숙왕 15) |
창건자 | 지공 |
경내문화재 |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 석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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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천보산(天寶山)에 있는 절.
내용
개요
회암사는
역사
건립
회암사(檜巖寺)의 건립시기는 사료의 부족으로 잘 찾아지지 않는다. 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1174년 금나라의 사신이 회암사에 왕래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12세기쯤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1] 그 뒤 1328년(충숙왕 15) 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 들어온 지공이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를 본떠서 266칸의 대규모 사찰로 중창하였으며, 1378년(우왕 4) 나옹(懶翁)이 중건하였다 한다.[2][3]
조선 태조는 나옹의 제자인 무학(無學)을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여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찬례토록 하였으며, 왕 위에서 물러난 뒤에는 친히 회암사에 머물면서 수도생활을 했다. 그 뒤로도 회암사는 조선 왕실과 지속적인 인연을 맺어오다가 명종 때 보우(普雨)가 머물면서 다시 번창하게 된다. 하지만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의 후원으로 기세를 올리던 보우는 문정왕후가 죽은 뒤로 제주도로 유배되어 살해되었고, 문정왕후와 보우에 대한 유생들의 반감이 회암사를 폐사시켰다.[4] 대사찰이 폐사되면서 1821년(순조 21)에 이응준이란 자가 술사 조대진의 말을 듣고 이 곳 법당자리에 선친의 묘소를 옮기기 위하여 절터에 남아있던 지공(指空)과 무학의 비를 철거하였다. 하지만 이후 이 사실이 알려지자 나라에서 두 사람을 섬으로 유배하고 1828년(순조 28)에 비를 원래의 위치에 다시 세우면서 옛터의 오른쪽에 작은 절을 짓고 회암사의 절 이름을 계승하였다.[5]
1922년에는 봉선사 주지 홍월초(洪月初)가 새로 보전을 지어 불상을 봉안하고 지공, 나옹, 무학의 세 화상의 진영을 모셨다고 한다. 이후 1977년에 호선이 서북쪽에 큰 법당을 지었다. 1964년 이곳을 국가지정 사적 제128호로 지정하여 보존·관리해오다가 1996년부터 우회도로 개설과 사지에 대한 장기적인 조사·발굴 계획을 수립하여 현재 경기도 박물관에서 조사·발굴하고 있다.[6]
회암사와 왕실불교
정청(正廳)의 위치
풍수지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회암사(檜巖寺)의 가장 중요한 혈처에는 정청(正廳)이 위치한다. 정청은 왕실사찰로서 회암사의 성격을 잘 드러내주는 건축물이다. 공민왕과 공양왕은 남경(南京) 행차에서 돌아가는 길에 정청에 머무르며 불사를 베풀고 많은 물품을 하사하였다. 또 왕은 탄신 축하를 이곳에서 받기도 했는데, 동행한 왕세자와 왕세자비가 정청에서 철야 예불을 올렸다. 조선이 개국한 이후에 정청은 조선 태조가 회암사에 방문하면 머무르는 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7]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 양주 회암사 | A는 B에 있다 | |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 양주 회암사 | A는 B에 있다 | |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 석등 | 양주 회암사 | A는 B에 있다 | |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 나옹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
나옹 | 양주 회암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이색 | 양주 회암사 | A는 B와 관련있다 | |
무학 | 양주 회암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보우 | 양주 회암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지공 | 양주 회암사 | A는 B를 창건하였다 | |
조선 태조 | 양주 회암사 | A는 B와 관련있다 | |
공민왕 | 양주 회암사 | A는 B와 관련있다 | |
공양왕 | 양주 회암사 | A는 B와 관련있다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328년 | 원나라에서 온 지공이 인도의 나란타사를 본떠서 양주 회암사를 중창했다. |
1378년 | 나옹이 양주 회암사를 중건했다. |
1821년 | 이응준이 양주 회암사에서 지공과 무학의 비를 철거하였다 |
1828년 | 양주 회암사에 지공과 무학의 비를 원래 위치에 다시 세웠다 |
1964년 | 양주 회암사가 국가지정 사적 제128호로 지정되었다 |
1996년 | 경기도 박물관에서 양주 회암사에 대한 조사, 발굴을 시작했다 |
시각 자료
영상
- TAEMIX STUDIO, "사라진 절터의 비밀,회암사지 - 태믹스의 역사지식문화 콘텐츠", YouTube, 게시일: 2015년 6월 3일.
- 622년산 양주, "삼화상과 거대사찰 회암사 양주의 유산", YouTube, 게시일: 2014년 4월 13일.
주석
- ↑ 국내관광진흥팀, "조선 불교의 흥망성쇠 현장으로- 양주 회암사지"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 한국관광공사, 작성일: 2016년 9월 19일. - ↑ 한정수, "회암사",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 같은 내용은 고려 말에 목은 이색(李穡)이 쓴 《천보산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총 262칸에 전각들로 이루어진 회암사의 가람은 동방에 제일이며 법당에는 15척(4.5m)의 불상 7구와 10척(3m)의 관음상이 봉안되어 있다고 적혀있다. 국내관광진흥팀, "조선 불교의 흥망성쇠 현장으로- 양주 회암사지",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 한국관광공사, 작성일: 2016년 9월 19일. - ↑ 국내관광진흥팀, "조선 불교의 흥망성쇠 현장으로- 양주 회암사지"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 한국관광공사, 작성일: 2016년 9월 19일. - ↑ "회암사",
『두산백과』online . - ↑ 국내관광진흥팀, "양주 회암사지"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 한국관광공사. - ↑ 박정해, 「회암사 입지의 풍수환경과 해석」, 동북아문화연구 제40집, 2014, 151-152쪽.
참고문헌
- 박정해, 「회암사 입지의 풍수환경과 해석」, 동북아문화연구 제40집, 2014, 143-158쪽.
- 임연태, 「양주 회암사」, 시와세계 제26호, 2009, 163-172쪽.
- 조유선,"양주 회암사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정수, "회암사",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국내관광진흥팀, "조선 불교의 흥망성쇠 현장으로- 양주 회암사지"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 한국관광공사. - 국내관광진흥팀, "양주 회암사지"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 한국관광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