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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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리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4월 27일 (목) 03:10 판 (귀국 및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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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義天)()
파일:Seonamsa uicheon.jpg
순천 선암사 대각국사 의천 진영 (順天 仙巖寺 大覺國師 義天 眞影)[1]
대표명칭 의천(義天)
영문명칭 Uicheon
생몰년 1055년(문종 9)-1101년(숙종 6)
시호 대각국사(大覺國師)
우세(祐世)
후(煦)
법호 석후(釋煦), 의천(義天)
의천(義天)
성씨 왕씨(王氏)
속명 왕후(王煦)
출신지 경기도 개성
승탑 순천 선암사 대각암 승탑
승탑비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탑비, 영통사대각국사비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의천은 1055년 고려 왕실의 왕자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고려 제11대 왕인 문종(文宗)이며, 어머니는 인예왕후(仁睿王后) 이씨(李氏)로, 의천은 넷째 아들이다. 순종, 선종, 숙종은 모두 의천의 친형이며, 헌종은 의천의 숙부이다.

출가수행

의천은 1065년 5월 11세의 나이로 영통사(靈通寺)에서 화엄종(華嚴宗) 승려인 경덕국사 난원(景德國師 爛圓)에게 출가하였으며, 같은해 10월 불일사(佛日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1066년 난원이 입적하자 의천은 법형제이지만 스승의 나이뻘인 창원(昶元), 이기(理琦) 등의 승려들의 지도를 받았다.[2]


Quote-left.png 어느 날 문종 임금께서 모든 왕자를 불러 놓고, “누가 능히 스님이 되어 복전(福田)으로 국조(國祚)와 국민의 이익을 위하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이 때 국사께서 일어나 여쭙기를, “신이 출가 수도할 뜻을 가지고 있으니 오직 원하옵건대 허락하여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임금이 말하되, “좋다” 고 윤허하였다. 어머니인 인예태후가 이 말을 듣고 태몽과 부합한다고 생각하나, 학업을 마친 다음 부왕의 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떨까 하였으나,어찌할 수 없었다. 을사년 5월14일 경덕국사(景德國師)를 내전으로 초정하여 은사가 되어 삭발 수계(受戒)토록 하였다. 이 때 문종이 재배하고 경덕국사를 따라 궁중에서 영통사에 있게 하였다. 그 해 10월 불일사(佛日寺) 계단(戒壇)에 가서 구족(具足)을 받았으니 당시 나이 11살이었다. 비록 어린 나이지만 학문을 쉬지 아니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통사대각국사비


1069년 의천은 문종으로부터 우세(祐世)라는 호와 승통(僧統)의 직위를 하사받았다.[3]


Quote-left.png 정미년 7월(1067년) 을유에 문종이 교서를 내려 포창하고 우세 승통(祐世僧統)이란 승직(僧職)을 하사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통사대각국사비


Quote-left.png 문조 23년(1069년)에 우세라는 호를 하사하고 승통직을 내렸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선봉사 대각국사 비문


구법유학

의천은 1085년 4월부터 1086년 6월까지 약 14개월 동안 중국 송나라로 유학하여 구법활동을 하였다.

귀국 및 활동

의천은 1086년 6월 귀국하여 흥왕사(興王寺)의 주지가 되었다.


1091년에는 흥왕사교장도감을 설치하고 송·요·일본 등에서 수집한 불교 경전을 목판으로 간행하였으며, 이에 앞서 1090년에는 경/율/논의 삼장에 관한 주석서인 장소의 목록을 "신편제종교장총록"으로 정리하였다.


1094년 홍원사(洪圓寺)의 주지가 되어 중국 화엄의 아홉 조사(祖師)를 기리는 ‘구조당(九祖堂)’을 세우기도 하였다.

Quote-left.png 갑술년 2월 초에 홍원사(洪圓寺)로 옮겼으나, 그의 교학진작은 옛과 같았다. 흥왕사에 주석하던 초기에 맏형인 순종이 병세가 위독하여지므로 국사를 불러 이르기를, “과인이 일찍부터 대가람을 창건하여 사액을 홍원사로 하기를 발원하였으나, 지금 나의 병세가 위독하여 이를 성취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되니, 만약 내가 죽고 차자인 운(運 : 宣宗) 이 왕위를 계승하거든 나의 소원을 잊지 말고 승통도 동심협력(同心協力)하여 이 불사를 회향(回向)하도록 하라” 고 하였다. 순종으로부터 당부를 받은 국사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감히 심력(心力)을 다하고 죽는 한이 있어도 변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다짐하였다. 그 후 홍원사가 낙성됨에 국사를 주지로 임명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통사대각국사비


헌종(獻宗)이 즉위한 뒤에는 전라남도 순천의 선암사(仙巖寺), 경상남도 합천의 해인사(海印寺) 등에서 머물렀다.

Quote-left.png 40세 때인 1094년 5월 복잡한 개경(開京)을 벗어나 해인사로 퇴거하여 계산(溪山)과 더불어 자적하였다. 호연한 기백으로 지내면서 여기서 이 세상을 마치려는 ‘종언지지(終焉之志)’를 가졌다. 조카인 헌종(獻宗)이 두 차례에 걸쳐 개성으로 되돌아오도록 청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통사대각국사비



1095년 숙종(肅宗)이 즉위한 뒤에 다시 개성 흥왕사로 돌아왔다.

Quote-left.png 을해년 10월 8일 셋째 형인 숙종(肅宗)이 즉위해서도 수차례에 걸쳐 친서를 보내 개경으로 돌아오도록 하였으나 굳게 사양하였다. 그러나 또 교서를 보내 이르기를, “스님께서 왕도(王都)로 돌아오시기를 바라는 불곡(不穀)의 마음은 날이 갈수록 더욱 간절합니다. 오직 고산(高山)의 경행(景行)과 오매(寤寐)의 증상(增想)일 뿐 아니라 겹합(鵊鴿) 재원(在原)과 같이 의리를 존중하는 것이지 다른데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과인(寡人)이 직접 가서 뵙지는 못하고 여러 번 성청(誠請)하여 고적(高跡)에 불의(拂衣)하였으나 일찍부터 과인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옛 성인들은 비이비혜(非夷非惠)하고 시속(時俗)과 더불어 권서(卷舒)가 무애(無礙)하였으니, 바라건대 한 번 와서 나의 뜻에 부합(副合)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라는 내용이었다. 국사는 이 교서를 보고 번연히 이르기를, “정중한 예를 갖추어 후사(厚辭)함에는 그 의리(義理)를 거역할 수 없다” 하고, 곧 바로 개경으로 돌아가서 다시 흥왕사에 주석하면서 교학 진흥(敎學振興)은 여전히 계속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통사대각국사비


입적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비 의천 A는 B를 위한 비이다
영통사 대각국사비 의천 A는 B를 위한 비이다
순천 선암사 대각암 승탑 의천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비 칠곡 선봉사 A는 B에 있다
순천 선암사 대각암 승탑 순천 선암사 A는 B에 있다
영통사 대각국사비 개성 영통사 A는 B에 있다
의천 순천 선암사 A는 B를 중창하였다
의천 개성 영통사 A는 B에서 출가하였다
난원 개성 영통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난원 의천 A는 B의 스승이다
의천 문종 A는 B의 아들이다
의천 개성 흥왕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교장도감 개성 흥왕사 A는 B에 설치되었다
의천 교장(속장경) A는 B를 편찬하였다
교장(속장경) 교장도감 A는 B와 관련있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055년 의천 출생
1065년 의천 출가. 경덕국사 사법승.
1085년 의천 당나라 유학
1086년 의천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
1101년 의천 입적
1137년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탑비 건립

참고문헌

각주

  1. "순천 선암사 대각국사 의천 진영",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문화재청. 최종확인: 2017년 4월 26일.
  2. 허흥식, 의천의 사상과 시련, 329쪽.
  3. 비문에 따라 1069년, 1067년 차이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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