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 달성서씨(達成 徐氏)
경산 달성서씨(達成 徐氏)
서진(徐晋)을 시조로 하고 서사선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경산시의 세거 성씨.
달성 서씨는 대구광역시를 본관으로 하는 경산 지역의 세거 성시로, 고려 시대의 공신 서진(徐晉)을 시조로 한다. 달성 서씨는 서진을 파조로 하는 판도공파(版圖公派)와 고려 시대에 조봉대부(朝奉大夫)를 지낸 서한(徐閈)을 파조로 하는 소윤공파(少尹公派)로 나뉜다. 경산 지역에 세거하고 있는 달성 서씨는 판도공파에 속한다. 달성 서씨 판도공파의 시조 서진은 고려 시대에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다. 이후 나라에 공을 세워 현재 대구광역시에 해당하는 달성(達城)을 식읍으로 하사받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하여졌다. 서진의 후손들은 대구 지역을 중심으로 세거하면서 전국 각지로 분가하였다. 달성 서씨 판도공파는 현감공파(縣監公派)·학유공파(學諭公派)·판서공파(判書公派)·감찰공파(監察公派)·진사공파(進士公派)·생원공파(生員公派)·진사공파(進士公派)·참판공파(參判公派)·종사랑공파(從事郎公派) 등 9개의 파로 분파되어 있다. 경산 지역에 세거하고 있는 달성 서씨는 판서공파가 다수이다. 달성 서씨는 1644년(인조 22)경에 경산 지역에 입향한 것으로 추정된다. 달성 서씨 경산 입향조는 조선 중기의 유학자인 동고(東皐) 서사선(徐思選)[1579~1651]이다. 대구 남산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린 시절 사촌 형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1550~1615]에게 학문을 배웠다. 이후 다시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의 문하에 들어가 퇴계학맥을 이었다. 서사선은 대구 하빈현 이천리에 거주하다가 혼인 후 처가가 있는 지금의 경산시 상방동으로 이거하였다. 이거 후 대구와 경산 지역을 중심으로 후학을 양성하였다. 서사선의 후손들은 1755년(영조 31)에 지금의 경산시 중방동으로 이주하였고, 이후 중방동을 중심으로 세거하였다. 달성 서씨 집성촌이 있는 중방동은 한때 300호의 가구 중 20~30여 호를 제외하고 달성 서씨일 정도로 큰 집성촌을 이루었다고 한다. 현재는 중방동 지역이 개발되며 집성촌은 남아 있지 않지만, 문중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통계 자료에 의하면 달성 서씨는 전국적으로 40여만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경산시에는 3,372명이 거주하고 있다. 달성 서씨 관련 유적으로는 서사선을 배향하기 위해 건립한 옥천서당(玉川書堂)이 경산시에 남아 있다. 1786년(정조 10)에 중방동 동산 아래에서 창건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1869년(고종 6) 봄에 강당의 구재(舊材)를 사용하여 가까운 곳으로 터를 옮겨 옥천서당을 세웠다가, 1947년에 다시 지금의 위치인 경상북도 경산시 중방동 882-3번지로 이건하였다. 매년 7월 17일에 서사선에 대한 불천위(不遷位) 제사를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