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달성서씨(達城徐氏)
여수 달성서씨(達城徐氏)
서진(徐晉)을 시조로 하고 서득선 등을 입향조로 하는 전라남도 여수시 세거 성씨.
달성 서씨는 고려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고 달성군(達成君)에 봉해지고 서씨 성을 받은 서진(徐晋)을 시조로 한다. 서진의 후손은 7세손 때 서제(徐濟)를 파조로 하는 현감공파(縣監公派), 서도(徐渡)를 파조로 하는 학유공파(學諭公派), 서섭(徐涉)을 파조로 하는 판서공파(判書公派), 서근중(徐近中)을 파조로 하는 감찰공파(監察公派)로 갈렸고, 이후 세계를 이어 오면서 다시 분파되었다. 달성 서씨 여수 입향은 명종 때로 알려져 있다. 당시 순천에서 살던 서득선(徐得善)이 여수시 율촌면 조화리에 세거할 자리를 잡았다 한다. 그 뒤 인조 때 판서공파 서섭의 후예 서세남(徐世南)·서윤오(徐潤五) 형제가 대구에서 화양면 창무리에서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 뒤 효종 때에는 현감공파 서제의 후손 서의상(徐儀尙)이 역시 대구에서 소라면 죽림리에 정착했다. 또,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의 현손 서익성(徐翊省)이 통덕랑까지 지낸 뒤 율촌면 조화리로 옮겨 와 초야에 묻혀 살았다. 숙종 때는 시조의 13세손 서계립(徐繼立)·서후기(徐後耆) 부자가 웅천동 웅서마을에 자리를 잡았으며, 영조 때는 서사룡(徐思龍)이 대구에서 상암동 진례마을로 옮겨 살았으며, 서명선(徐命善)은 순천에서 소라면 복촌마을로 이거했다. 최초 입향자 판서공파 서세남·서윤오의 후손들은 여수시 화양면 창무리와 소라면 복산리 대곡마을을 비롯하여 시내와 삼일동에 분산되어 거주하고 있다. 현감공파로서 소라면 죽림리에 입향한 서의상의 후손들은 화장동 화산마을과 소라면 죽림리와 차동마을 등에 분산되어 큰 문중을 이루고 있다. 서계립의 후손들은 웅서마을과 시목마을에 분가하여 터전을 닦고 살다가 신도시가 조성됨에 따라 분산되어 주거하고 있다. 서익성의 후손들은 현재도 여수시 율촌면 조화리 득실마을에 살고 있다. 또, 서사룡의 후손들은 현재에도 상암동 진례마을에 30여 호가 세거하고 있다. 여수시 율촌면 조화리 득실마을에 화곡사(禾谷祠)가 있다. 화곡사는 면암 최익현의 문하생으로 마을에 청추당(廳秋堂)을 지어 놓고 시인묵객들과 교류하면서 일생을 보낸 호조참판(戶曹參判) 서병두(徐丙斗)를 추모하기 위하여 달성 서씨 문중에서 1939년에 건립한 사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