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초상화관 개관

이현보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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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S김지선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1월 4일 (토) 12:39 판 (초상에 묘사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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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보 초상
역사인물초상화 초상 이현보 초상.jpg
한자명칭 李賢輔 肖像
작가 옥준상인
제작시기 1537년
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문화재지정사항 보물 제872호
유형 초상
크기(세로×가로) 126×105㎝


정의

조선시대 문신인 이현보(1467∼1555)의 모습을 그린 초상.

내용

초상의 제작 및 보관

조선시대의 화승 옥준상인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이현보의 초상화로 1536년 이현보가 경상도 관찰사로 있던 때에 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화가인 옥준상인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이현보의 아들인 이중량의 문집 중 옥준상인이현보의 교류에 관한 시가 수록되어 있어 이현보와 교류한 인물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물건이나 금은니 등의 사용, 의복 처리 묘법 등에서 불화와의 연관성이 보여 화승으로 추측하기도 한다.[1]
이현보의 초상화는 이 원본 <이현보 초상>외에도 1827년에 이재관이 그린 이모본이 1점 있다. 이 이모본을 제작할 때의 절차와 의례, 제작과정 및 사후 처리 등이 기록된 『영정개모시일기(影幀改模時日記)』이 전하고 있어 영정 개모 당시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2]
당시 제작된 이모본도 현재 전하고 있는데 서안에 펼쳐진 서책이 원본과 달리 입체적으로 그려진 점 등에서 차이를 보인다. 현재 <이현보 초상>은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되었고 이모본은 안동 농암종택에 보관중이다.


조선국 완산 이공, 휘는 광사, 자는 도보, 호 원교선생 유상(朝鮮國 完山李公 諱匡師 字道甫 號圓嶠先生 遺像)
우리 영묘 임오년(1762)에 선생은 부령에서 신지도로 이배되었으며, 정유년(1777) 8월 26일에 섬의 금실촌 우사에서 돌아가셨다. 향년 73세였다.(鮮國 完山李公 諱匡師 字道甫 號圓嶠先生 遺像 我 英廟 壬午 先生自富寧移謫 薪智島 丁酉 八月二十六日卒 于島之 金實村寓舍 壽七十三)
이 초상은 70세 선생이 70년 되는 갑오년(1774) 겨울에 신한평이 그린 것이다.(此本卽 先生七十歲 甲午冬 畵師申漢枰 所寫)
8월 26일은 선생의 생신이다. 선생께서는 섬에 계실 때 자칭 수북노인이라 하셨다(八月 二十六日 卽 先生 降辰先生在島 自稱壽北老人) |출처= 조선미, 『한국의 초상화, 形과 影의 예술』, 돌베게, 2009, 268~269쪽.[3] }} 이 화제를 통해 화원 신한평이 유배지로 찾아가 이광사의 70세 초상을 그린 것을 알 수 있다.[4]
<이광사 초상>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작가인 신한평어진도사에도 참여했던 뛰어난 초상화가였다. 몇 점 남아있지 않은 유배지에서 그려진 초상화이며 신한평의 작품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초상화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문헌에 기록된 외모

이현보의 외모에 관해서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등 에 짧은 언급이 있다.

Quote-left.png 연산군이 전교하기를, “전일 경연(經筵)에서 사관을 정청(政廳)에 참여시키도록 청하는 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은 낯이 검고 수염이 많았으니, 이는 반드시 이현보(李賢輔)일 것이다. 신진으로서 감히 의논드리는 것은 지극히 불가한 일이니 잡아다가 장형에 처하고, 현보가 계청하기 전에도 또한 말한 자가 있었으니 아울러 상고하여 아뢰라.”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傳曰: "前日經筵有請以史官參政廳者, 其人面黑髯多, 必是李賢輔也。 以新進敢議, 至不可也, 拿來決杖。 賢輔啓請前亦有言者, 竝考啓。" 『燕山君日記』


퇴계 이황이 쓴 이현보의 행장에는 “일을 당하면 강직하고 동요되지 않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공을 소주두루미(燒酒陶甁)라고 이름하니, 외모는 거무스레하나 속은 맑고 냉엄하다는 뜻이었다.”[5] 라는 기록이 있다.

초상에 묘사된 모습

<이현보 초상>은 우안팔분면의 전신부좌상(全身趺坐像)으로서 서안을 앞에 두고 앉은 특이한 형상을 하고 있다. 머리에는 패랭이를 쓰고 있다. 담홍색의 시복을 입고 허리에는 서대를 하고 있다.
이 초상화에는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몇 가지 특징이 보인다. 손이 소매 밖으로 나와 있으며, 인물 앞쪽에 서안이 배치되어있고, 흑피화를 신고 부좌한 모습 등이 그러하다. 또한 왼손에 불자를 들고 있고 금은니를 사용하는 등 불화적인 요소도 나타나고 있다.[6]
안면의 묘사는 단순한 구륵법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목구비의 특징을 약간 과장해서 표현한 만화적인 느낌도 준다. 남겨진 기록으로 볼 때 이현보는 얼굴이 검고 수염이 많은 것이 특징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림 속에 낯빛이 조금 어둡고 수염이 아주 풍성하게 그려진 모습이 전해지는 기록에 부합하는 모습이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이광사 초상 초상 A는 B에 해당한다 A dcterms:type B
이광사 초상 이광사 A는 B를 묘사하였다 A ekc:depicts B
이광사 초상 신한평 A는 B가 그렸다 A dcterms:creator B
이광사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이광사 초상 이광사 초상 화제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이광사 초상 원교선생묘지명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원교선생묘지명 이광려 A는 B가 썼다 A dcterms:creator B
이광려 이광사 A는 B와 같은 혈족이다 A ekc:isLineageKinOf B
이광사 초상 좌안팔분면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방건 이광사 초상 A는 B에 나타난다 A ekc:isShownOn B
도포 이광사 초상 A는 B에 나타난다 A ekc:isShownOn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775년 이광사 초상이 제작되었다.
2006년 12월 29일 이광사 초상이 보물 제1486호로 지정되었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5238510 126.9804700 이광사 초상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시각자료

주석

  1. 조선미, 『한국의 초상화, 形과 影의 예술』, 돌베게, 2009, 174쪽.
  2. 조선미, 『한국의 초상화, 形과 影의 예술』, 돌베게, 2009, 175쪽.
  3. 조선미, 『한국의 초상화, 形과 影의 예술』, 돌베게, 2009, 268~269쪽.
  4. 조선미, 『한국의 초상화, 形과 影의 예술』, 돌베게, 2009, 268~269쪽.
  5. 遇事鯁直不撓。時人號公爲燒酒陶甁。「崇政大夫行知中樞府事聾巖李先生行狀」 『退溪集』
  6. 조선미, 『한국의 초상화, 形과 影의 예술』, 돌베게, 2009, 172쪽.

참고문헌

유용한 정보

  1. "이광사초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06년 26일.

더 읽을거리

  1. 단행본
    • 문화재청, 『한국의 초상화 : 역사속의 인물과 조우하다』 , 눌와, 2007.
    • 이수미, 이혜경, 『조선시대 초상화Ⅱ』, 국립중앙박물관, 2008.
  2. 전시도록
    • 국립중앙박물관, 『초상화의 비밀』, 국립중앙박물관, 2011.
  3. 논문
    • 이원복 「일재 신한평의 화경 (逸齋 申漢枰의 畵境)」, 『동악미술사학』 창간호, 동악미술사학회, 2009, 29-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