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
장보고(張保皐) | |
대표명칭 | 장보고 |
---|---|
한자표기 | 張保皐 |
생몰년 | ?-846년 |
이칭 | 궁복(弓福), 궁파(弓巴) |
시대 | 남북국 |
국적 | 신라 |
대표직함 | 청해진대사 |
성격 | 상인,무장 |
목차
정의
신라 후기의 지방세력가이자 상인으로 청해진(淸海鎭 : 전라남도 완도)을 설치하여 당나라와 신라,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을 주도하였다.
설명
당에서 활약
원래의 이름은 '궁복(弓福)'으로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등 일본의 문헌에는 이름의 한자 표기가 '張寳高(長寶高)'로 되어 있다. 친구인 정년(鄭年)과 함께 일찍이 당나라 서주(徐州)로 건너가 당의 지방군인 무령군(武寧軍) 소장(小將)을 지냈다.
당과 신라 중앙 정부의 집권력이 느슨해진 틈을 타 도적이 횡행하였고, 바다에서도 당나라 해적이 신라 해안에 출몰해 노략질을 하고 주민들을 잡아가서 중국에 노예로 팔았으며 무역선도 해적의 위협을 받았다. 장보고는 해적들이 신라인을 잡아가는 것에 대해 분노했고, 스스로 해상권을 통괄해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볼 야망을 불태웠다.
청해진 설치
828년 당에서 돌아온 그는 흥덕왕(興德王, 재위 826~836)에게 청해(淸海)에 진영을 설치할 것을 청하여 1만 명의 병사로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고 대사(大使)로서 병사들을 지휘하여 해적을 소탕하고 서남부 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당나라에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와 교관선(交關船)을 보내고, 일본에는 회역사(廻易使)을 보내어 당나라와 신라,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을 주도하였다.
그는 중국 산동성 문등현(文登縣) 적산촌(赤山村)에 법화원(法華院)을 건립하고 이를 지원하였다. 법화원은 상주하는 승려가 30여 명이 되며, 연간 500석을 추수하는 장전(莊田)을 가지고 있었다. 이 지역 신라인의 정신적인 중심지로서 법회 때에는 한꺼번에 250여 명이 참석했던 적도 있었다. 장보고의 세력이 중국 동해안의 신라인 사회에도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쟁 연루
845년 장보고는 자신의 딸을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7)의 둘째왕비로 보내려 했으나 중앙의 귀족들의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자 장보고는 청해진에 웅거하여 왕에게 반기를 들었으며, 846년(문성왕 8) 문성왕은 염장(閻長)을 자객으로 보내 장보고를 살해하였다. 그리고 851년(문성왕 13)에는 청해진을 없애고 그곳 사람들을 벽골군(碧骨郡)으로 이주시켰다.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청해진 | 장보고 | A는 B가 설치하였다 | A ekc:founder B |
박광진-장보고의 해상 활동 | 장보고 |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 A ekc:depicts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828년 | 장보고는 청해진을 설치하였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4.358586 | 126.735035 | 장보고가 청해진을 전라남도 완도군 장도에 설치하였다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완도 장보고 기념관 1층 전시실[1]
완도 장보고 기념관 청해진 디오라마[2]
완도 장보고 기념관 청해진 디오라마[3]
완도 장보고 기념관 장보고 초상화[4]
완도 장보고 기념관 장보고 일대기 안내판[5]
장도 청해진 유적 전경[6]
우물[7]
외성문[8]
사당[9]
남측 굴설주[10]
영상
주석
- ↑ 민족기록화팀(2017년 04월 26일 촬영)
- ↑ 민족기록화팀(2017년 04월 26일 촬영)
- ↑ 민족기록화팀(2017년 04월 26일 촬영)
- ↑ 민족기록화팀(2017년 04월 26일 촬영)
- ↑ 민족기록화팀(2017년 04월 26일 촬영)
- ↑ 민족기록화팀(2017년 04월 26일 촬영)
- ↑ 민족기록화팀(2017년 04월 26일 촬영)
- ↑ 민족기록화팀(2017년 04월 26일 촬영)
- ↑ 민족기록화팀(2017년 04월 26일 촬영)
- ↑ 민족기록화팀(2017년 04월 26일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