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종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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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현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8월 19일 (토) 17:35 판 ((귀국 및)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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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린(宗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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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종린
영문명칭 Jongrin
한자 宗璘
생몰년 1127년(인종 5)-1179년(명종 9)
시호 현오(玄悟)
중지(重之)
성씨 왕씨(王氏)
승탑비 용인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휘는 종린(宗璘), 자는 중지(重之), 속성은 왕(王)씨로 고려 17대 국왕 인종(仁宗)의 아들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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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휘는 종린(宗璘)이요, 자는 중지(重之)며 속성은 왕씨(王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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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출가수행

13세에 승려가 되고자 하였다. 이에 의천(義天)의 유풍을 이을 사람이 없을까 염려하던 인종은 징엄(澄儼)에게 명하여 불일사(佛日寺)에서 1141년(인종 19) 수계(授戒)하게 하였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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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겨우 13살 때, 교(敎) (결락) 원(院)에서 간청하여 득도(得度)하고 법문(法門)이 되었다. 인묘(仁廟)께서 일찍부터 대각(大覺)의 여풍(餘風)을 계승 발전시킬 사람이 없을까 염려하다가, 이 때에 이르러 기꺼이 원명(圓明)국사(國師)에게 명하여 (결락) 시시(示時). 인자일(因自日) (결락) 희문자(喜文字). 15살 때, 불일사(佛日寺)에 나아가서 비구계(比丘戒)를 받았으니, 신유년(辛酉年) 12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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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활동

인종이 항상 궁궐 내 도량으로 종린을 초빙하여 강론을 들었다. 이후 의종이 즉위하자 종린을 1146년에 수좌(首座)로 진급시켰다. 그 후 귀신사, 국태사, 중흥사, 부석사 등에 주지하는 동안에도 검소하여 방장실 안에 10전(錢) 값어치의 저축물도 없었으므로 사부대중이 모두 존경하였다. 이에 임금이 승통(僧統)으로 추대하였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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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묘(仁廟)께서 항상 궁내(宮內)의 도량에 국사를 청하여 강론하였는데, 청중이 날마다 경청하고 조금도 게을리하는 이가 없었다. 황통(皇統)(결락) 의종(毅宗) 원년(元年) 병인(丙寅)에 비서(批書)를 내려 수좌(首座)로 진급(進級)하였다. 그 후 귀신(歸信)·국태(國泰)·중흥(重興)·부석등사(浮石等寺)를 차례로 주지(住持)하였다. 그러나 방장실(方丈室)은 소연(蕭然)하게 텅비어 십전(十錢) 값어치의 저축물도 없었다.항상 안여(晏如)하여 울창한 종실(宗室)이 되어 궤(軌) (결락) 스님께서는 일찍부터 도덕을 쌓아 일대(一代)에 걸쳐 사부대중(四部大衆)의 아망(雅望)의 대상이었으므로, 이에 배명(拜命)하여 승통(僧統)으로 추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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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171년(명종 1) 임금이 만수가사(滿繡袈裟) 1벌을 하사하고 그해 겨울 백고좌회(百高座會)를 열고 스님을 청해 강설을 듣은 후 임금이 좌세(佐世)라는 호를 내리고, 내전에 불러서 가사 한 벌을 하사하였다. 이때 의종의 아우인 충희(冲曦)를 출가시켰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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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묘년(辛卯年) 가을에 내전(內殿)으로 초빙하여 만수가사(滿繡袈裟) 한 바탕을 하사하였다. 그 해 겨울에 이르러 백고좌회(百高座會)를 열고, 스님으로 하여금 (결락) 월(月)에 조금 몸이 불편하므로 문인(門人)이 의사를 청하니, 스님께서 이르되 (결락) 지(之) (결락) 의(矣) (결락) 미(未) (결락) 의사를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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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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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향문
  2. 민백
  3. 향문
  4. 향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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