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惟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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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유정 |
한자 |
惟政 |
생몰년 |
1544년(중종 39)-1610년(광해군 2) |
시호 |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
호 |
사명당(四溟堂), 사명(四溟), 송운(松雲) |
법명 |
유정(惟政) |
자 |
이환(離幻) |
이칭 |
종봉(鍾峯) |
성씨 |
임씨 |
본관 |
풍천(豊川) |
속명 |
임응규(任應奎) |
출신지 |
경상남도 밀양 |
승탑 |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 |
승탑비 |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비 |
정의
조선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유정은 1544년(중종 39) 10월 17일에 밀양(密陽)의 삼강동에서 임수성(任守成)과 그 부인인 달성서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정의 집안은 선대에 대대로 명성과 신망이 높았던 풍천의 이름난 집안이었다. 증조부 임효곤(任孝昆)은 문과에 급제하여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조부 임종원(任宗元)은 강계부사를 지냈는데, 증조부가 일찍이 대구의 수령을 지냈기 때문에 밀양에 살게 되었다. 그가 태어나던 날에는 어머니가 꿈에 흰 구름을 타고 황색 두건을 쓴 금인(金人)을 데리고 만 길이나 되는 높은 대에 올라가니 늙은 신선이 그 위에 걸터앉아 있다가 머리를 땅에 대고 절을 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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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부 효곤(孝昆)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관직이 장악원 정(掌樂院 正)에 이르렀는데, 일찍이 대구(大丘)의 수령으로 있을 적에 밀성(密城, 밀양)에다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였다. 그는 유학(幼學) 종원(宗元)을 낳았고, 종원은 교생(校生) 수성(守成)을 낳았으며, 수성은 달성서씨(達城徐氏)에게 장가들었다. 서씨가 어느 날 저녁에 주부의 거처에 있다가 잠깐 졸면서 꿈을 꾸었는데, 누런 두건을 두른 황금빛 사람이 흰 구름을 타고 높은 누대에 올라가서 늙은 선옹(仙翁)에게 허리를 굽혀 절을 하니, 선옹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고해(苦海)를 건네주는 장년삼로(長年三老, 뱃사공)인데 , 어찌하여 나에게 와서 절을 하시는가?"라고 하였다. 그 소리를 귀로 듣는 순간에 갑자기 놀라 꿈에서 깨고 보니, 마치 오래 굶주렸다가 한 번 배불리 먹은 것 같고, 뭔가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두려운 생각과 함께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부터는 웃어도 잇몸을 보이지 않았으며 감히 트림이나 한숨이나 하품이나 기지개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년 뒤인 가정(嘉靖) 23년(1544) 갑진년 10월 17일에 대사를 낳았으니, 그때는 우리 중종(中宗) 성효대왕(誠孝大王)이 즉위하신 지 39년이 되는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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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명 유정 지음, 이상현 옮김, 『사명대사집』, 동국대학교출판부, 2014, 4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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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수행
유정은 7세를 전후하여 역사를 배우고, 13세 때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를 배웠다. 1558년(명종 13) 어머니가 죽고, 1559년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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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살 때 스님의 할아버지가 史記를 가르치려고 했더니 스님이 “學者의 業이 貴한 것입니까? 賤한 것입니까? 만약 귀한 것이라면 마땅히 배워서 게을리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물었다. 할아버지가 말씀하시기를 “이 世上에서 배움보다 더 貴한 것은 없다. 古今의 賢聖이 모두 배움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니, 어찌 감히 이를 疏忽히 할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스님이 말하기를 “만약 聖賢의 마음으로써 배움을 삼는 것이라면 貴한 것이고, 이를 어기는 것은 賤한 것이라 하겠으나, 그러나 간혹 世上에서 배운 바가 오히려 사람을 해롭게 하는 說이 많고, 반면 사람을 이롭게 하는 敎訓이 적으니, 이를 어찌 貴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라 하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되 “사람을 이롭게 하거나, 해롭게 하는 것이 空虛한 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마음의 善과 惡에 매여 있는 것이다. 너의 말이 참으로 一理가 있다.”고 칭찬하였다. 그리하여 스님은 이 때부터 스스로 힘써 공부하고 게을리하지 않았다.
13살 때 柳村 黃汝獻으로부터 孟子를 배우다가 어느 날 저녁 책을 덮고 탄식하면서 말하되, “俗學은 微賤하고 固陋하여 世緣을 번거롭게 하는 것이니, 어찌 불교의 無漏學說을 배우는 것만 같겠는가!”하고 곧 김천 黃獄山의 直指寺로 가서 信黙和尙을 은사로 하여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처음부터 禪典中 景德傳燈錄을 열람하다가 얼마되지 않아 이미 오묘한 宗旨를 깨달았으므로 여러 老宿들이 모두 찾아와서 배우고 質問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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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116-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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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임진왜란 이전
유정은 1561년 선과(禪科)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한 후 봉은사에 머물며 불교 경전을 부지런히 읽었다. 20여 세에 동녀배들로 갑회(甲會)를 조직하고 갑회문을 지어 나라와 백성을 위해 기도하며 건전한 승려 생활을 실행하자는 뜻을 다짐하였다. 한편 사암(思菴) 박순(朴淳),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자순(子順) 임제(林悌), 손곡(蓀谷) 이달(李達) 등 사대부 문인들과 시를 지으며 교유하였다. 한번은 하곡(荷谷) 허봉(許篈)과 중국의 문장가 한유(韓愈)의 글 한 편을 외우는 내기에 이겨 책 한 권을 받았다.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이 이야기를 듣고 "재주만 믿고 스스로 만족하면 학문에 발전은 없을 것"이라 하니, 이 말을 새겨듣고 공부에 열중하였으며,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에게서 많은 책을 빌려 읽는 이외에도 사자(四子, 공자·맹자·증자·자사)와 이백(李白), 두보(杜甫)의 시를 배워 일취월장하였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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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酉年에 禪科에 합격한 후부터 스님의 華麗한 所聞이 점차로 높아지자 一時의 學士·大夫·詩人인 朴思 菴·李鵞溪·高霽峰·崔嘉運·許美叔·林子順·李益之 등의 학자들이 모두 스님과 깊은 交驩을 가지면서 詩와 文翰을 唱和함으로써 詞林人들에게 널리 전파되어 美談이 되었다.
일찍이 荷谷과 더불어 韓愈(退之)의 文章 中 가장 많은 鉅篇을 골라 외우기 내기를 하였는데 스님은 한 번 읽고 완전하게 暗誦하였으므로 荷谷은 감탄하면서 곧 바로 手寫本을 전해 주었다. 奇高峰이 격려하되 “만약 이 재주만 믿어 自足하면 학문이 반드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것이며 세월을 虛費할 뿐 아니라 지금까지의 功勞를 그르칠 것이니 可惜하다.”고 하였다. 스님은 이 말을 듣고 정신을 가다듬고 엄숙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연마하고 조금도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四子書를 蘇齋相에게서 수학하였고, 또 李白과 杜甫의 詩도 배웠다. 이로부터 文章이 날마다 더욱 進趣를 보였을 뿐만 아니라, 內典의 千函도 또한 모두 섭렵하였으니, 方袍를 입은 스님으로서 竺墳을 익힌 강주들이 스님이 있는 山門으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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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117-1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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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은 1573년 직지사 주지로 있으면서 허응당(虛應堂) 보우(普雨)의 문집과 잡저의 간행에 발문을 쓰고 교정을 보았다. 1575년 선종(禪宗)의 수찰(首刹)인 봉은사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 서산대사의 문하로 들어갔다. 이로부터 3년 동안 수행을 거듭하였으며, 그 사이에 유정은 대동강 부벽루(浮碧樓)에 오르고, 고운 최치원의 족적을 따라 해인사를 비롯하여 사천 곤양성(昆陽城)과 하동 악양루(岳陽樓)를 유력하였다.[4]
1578년 서산대사의 문하를 떠나 금강산 보덕암(報德庵)으로 들어가 세번의 안거(安居)를 지내며 「동해사」 등 많은 시를 지었다. 1579년 『선가귀감』의 발문, 1580년 「부석사 안양루 중창기문」을 짓고 썼다. 이어 팔공산, 지리산, 청량산, 태백산 등을 순력하면서, 특히 태백산 운망사(雲望寺)의 이름을 고쳐 영은사(靈隱寺)라 한 것으로 보인다. 1583년 가을 관서로 가는 도중에 귀양살이하는 친한 벗 하곡을 생각하며 시를 지었다. 1586년 봄 옥천(沃天)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던 중 간밤의 비바람에 떨어진 낙화를 보고 문득 '무상(無常)'의 법을 깨달았다. 이에 제자들을 다 돌려보내고 홀로 선방에 들어가 가부좌하고 열흘 동안 선정에 들었다. 1589년에는 오대산 영감난야(靈鑑蘭若)에 머물면서 「월정사 법당의 서까래를 고치고 올린 글」을 지어 모금하며 사찰의 중수에 매달렸다. 이 가운데 정여립의 역모 사건에 모함을 받아 투옥되었으나 강릉 사림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5년 동안 계속된 공사는 단오절을 맞아 낙성식과 향조대회를 열어 완성을 고한 다음 유정은 금강산으로 들어갔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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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亥年에는 空門의 衆望을 받아 禪宗寺刹의 주지 추천을 받았으나, 굳게 사양하고,錫杖을 짚고 떠나 妙香山으로 들어가서 비로소 淸虛座下에서 법문을 청하였다. 서산스님은 心地法門을 제시하여 바로 性宗의 道理를 傳授하므로 스님은 청허의 言下에 大悟하고 곧 言語文字인 群言을 모두쓸어버리고 閑習도 함께 끊어버렸다. 從來에 詞家들과 교류하여 遊戱하면서 綺言妙句로 말 잔치를 벌리던 모든 것을 참회하는 마음으로 정리하고 安心과 定性에 뜻을 집중하여 3년 동안 苦行精進하여 正法의 골수를 얻었다. 戊寅年에 이르러 청허스님을 하직하고 楓岳山으로 가서 報德寺에서 3년간 정진한 후, 남쪽으로 발길을 돌려八公山, 淸凉山, 太白山 등을 두루 순례하였다.
丙戌年 봄 음성 沃川山 上東菴에 이르러 잠시 머무는 동안, 어느 날 밤 폭우가 내려 뜰 앞에 피었던 꽃이 모두 떨어졌다. 이를 본 스님은 문득 無常을 깨닫고 門人들을 모아 놓고 이르기를 “어제 활짝 피어 정원에 가득하였던 꽃 가지가 오늘은 쓸쓸한 빈 가지뿐이니, 人間 世上의 變滅함도 또한 이와 다를 바 없건마는, 허무한 人生이 마치 蜉蝣와 같은 데도 세월을 虛送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련한 일이아닐 수 없다. 너희들은 각각 신비한 自性을 具足하고 있거늘, 어찌 이를 다시 찾아 生死大事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가? 부처는 나의 마음속에 있거늘 어찌하여 마음 밖으로만 달려가 추구하여 세월만 보내고 있는가?”라 하고, 곧 문도를 四方으로 흩어 보내고는 홀로 禪室에 들어가서 가부좌를 맺고 黙言하면서 골똘히 精進하였다. 간혹 10여 일씩 문 밖으로 나오지 않으므로 문 구멍으로 엿보면 오뚝하게 앉아 있어 마치 흙으로 빚어 놓은 사람과 같았다.
己丑年에 강원도 平昌郡 五臺山靈鑑蘭若에 머물고 있었는데, 鄭汝立의 逆謀 사건에 연루되어 江陵府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儒士들이 그 억울함을 官에 호소하여풀려났다. 庚寅年에는 楓岳山으로 가서 3년간 住錫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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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119-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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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승병으로서의 활동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유점사(楡岾寺)에 있으면서 인근 아홉 고을의 백성들을 구출하였다. 이때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서산대사의 격문을 받고 승병을 모아 순안 법흥사(法興寺)로 가서 서산대사와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 탈환의 전초 구실을 담당하였다. 1593년(선조 26) 1월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의 혈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해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蘆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선조는 사명대사의 전공을 포장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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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辰年 여름에는 倭賊이 嶺東으로 침입하여 유점사에까지 이르렀다. 그 때 어떤 사람이 “우리 나라 사람이 왜적들의 길잡이가 되었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 스님이 말씀하되 “만약 倭賊뿐이라면 설득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혹시 우리 나라 사람이 案內를 하고 있다면 또한 筆談으로 이해를 시킬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10여 명의 문도를 거느리고 곧 유점사 山門으로 들어갔다. 문도들은 모두 결박을 당하였으나, 오직 스님만은 泰然한 자세로 당당하게 一柱門·中門을 거쳐 中堂인 큰 법당에 이르렀다. 이 때 倭將의 頭目이 스님을 보고 非常한 人物인 줄 알고 賓主의 禮儀로써 공경히 접대하고 결박했던 모든 스님들을 풀어 주었다. 스님께서 글로써(筆談) 주고 받으면서 法門을 들려 주었더니, 모든 倭寇들이 敬服하고 산중의 깊고 고요한 곳으로 보내드렸다. 스님께서 門徒들에게 이르시되, “如來께서 出世하신 본 뜻은 중생을 救護하기 위함인데, 이 倭賊들이 앞으로 횡포가 심하여져서 우리 백성들을 殘害할까 염려되니, 내가 마땅히 그들을 찾아가 狂賊들을 說諭하여 흉악한 무기를 버리게 한다면 아마 부처님의 慈悲한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다.”라 하고, 곧 바로 육환장을 짚고 高城으로 들어가니 賊將 3人이 함께 禮遇를 지극히 하였다. 스님께서 글을 써서 그들에게 절대로 殺生하기를 즐겨하지 말 것을 권하니, 세 장수가 모두 合掌하고 꿇어 앉아 戒를 받았다. 3일 동안 그들의 營內에 머물면서供養을 받고 떠날 때, 倭將들이 高城 문 밖까지 나와서 祖宴(錢別)을 베풀어 주었다. 당시 高城·杆城 등九個郡의 백성들이 모두 虔劉의 殘酷을 면하게 된 것은 대개 스님의 덕택이었다.
1592년 4월 마침내 宣祖大王이 한양을 내어주고 義州를 向하여 떠날 때, 비분 강개하여 모든 스님들에게 이르되, “우리들이 나라 땅에 살면서 편안히 먹고 자고 지금까지 살 수 있었던 것은 秋毫만한 작은 것도 모두 임금의 恩惠가 아닌 것이 없다. 이와 같이 어렵고 위태한 國難을 당하여, 그 어찌 앉아서만 바라볼 수 있겠는가?” 하고, 곧 數百名의 스님을 모아 火急히 順安 法興寺로 달려가니, 이미 각지에서 몰려온 數千名의 義僧兵이 모여 있었다. 이 때 淸虛스님은 朝廷으로부터 「摠攝諸道僧兵」이라는 직책을 받았으나, 스님께서는 自身이 年老하여 氣力이 衰耗하다는 이유로 代身 사명스님을 추천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 사명스님은 義僧兵인 대중을 통솔하고 軆察使 柳成龍을 따라 明나라로부터 온 응원군의 總司令官劉挺을 도왔다.
그 다음 해인 1593년 1월에 平壤을 탈환하고, 倭將인 小西行長을 몰아냈다. 그 후 都元帥 權慄을 따라 嶺南으로 내려가 宜寧에주둔하면서 적을 죽이고 生捕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선조 임금은 이를 嘉賞히 여겨 堂上官의 官階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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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121-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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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기요마사와의 회담
1594년 4월 명나라의 심유경(沈惟敬)과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협상과는 별도로 사명대사는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을 이간시키려는 계책의 주역을 맡게 되었다. 이때 처음으로 송운(松雲)이라는 법명으로 서생포(西生浦) 왜성을 찾아 가토 기요마사와 네 차례의 회담을 진행하였다.[7] 제1차 회담은 1594년 4월 13~16일 서생포 일본 본진에서 열렸는데 강화 5조약으로 제시된 ①천자와 결혼할 것 ②조선 4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③전과 같이 교린할 것 ④왕자 한 명을 일본에 보내 영주하게 할 것 ⑤조선의 대신 및 대관을 일본에 볼모로 보낼 것 등을 하나하나 논리적인 담판으로 척파하였다. 제2차 회담은 1594년 7월 12~16일, 제3차 회담은 1594년 12월 23일, 제4차 회담은 1597년 3월 18일 열렸는데, 이때도 대표로 나아가 강화 5조약의 모순을 지적하여 적들의 죄상을 낱낱이 척파하였다. 특히 제2차 적진 담판을 마치고 돌아와 선조에게 전말과 적정을 알리는 「토적보민사소(討賊保民事疏)」를 올렸으며, 1595년(선조 28)에는 장편의 「을미상소(乙未上疏)」를 올렸다.[8] 또한 가토 기요마사와 오갔던 대화와 관련된 일화도 회담시기에 있었던 일이다. 제2차 회담에서 가토 기요마사는
담판의 주요한 부분이 결렬되자 사명대사를 놀리기 위해 "귀국에도 보물이 있소?"라고 물었다. 그러자 "우리나라에서는 귀하의 머리를 금 천 근과 읍(邑) 만 호(戶)를 주고 산다고 하오. 이러한 막중한 것이 어찌 보배가 되지 않겠소" 라고 호방하게 맞받아쳤다고 한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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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午年 봄 總司令官인 劉挺의 命으로 스님은 釜山鎭營인 蔚山 西生浦로 세 번 찾아가서 倭將 加藤淸正을 만나 대화하면서 敵情의 자세한 內容을 파악하였다. 이 때 淸正이 탐욕스러운 눈으로 “朝鮮에 貴重한 보물이 있는냐?”고 물었다. 스님은 소리를 높여 대답하되 “우리 나라에는 보배가 없고, 귀한 보물은 日本에 있다.”고 하였다. 청정이 “무슨 말입니까?”라 하자 스님이 말씀하되 “지금 우리 나라에서는 당신의 머리를 가장 귀한 보물로 보고 모두 노리고 있으므로 보배가 日本에 있다고 한것입니다.”라 하였다. 이 말을 들은 淸正이 깜짝 놀라면서 스님의 法力과 愛國精神에 감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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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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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 강화 활동
유정은 국방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며 산성 수축에 힘을 다하였다. 사명대사가 수축한 산성은 팔공산성(八公山城)·금오산성(金烏山城)·용기산성(龍起山城)·악견산성(岳堅山城)·이숭산성(李崇山城)·부산성(釜山城) 및 남한산성 등이다. 그리고 군기 제조에도 힘을 기울여 해인사 부근의 야로에서 활촉 등의 무기를 만들었고, 투항한 왜군 조총병을 비변사에 인도하여 화약 제조법과 조총 사용법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1594년(선조 27) 의령에 주둔하였을 때 군량을 모으기 위하여 각 사찰의 전답에 봄보리를 심도록 하고, 산성 주위를 개간하여 정유재란이 끝날 때까지 군량미 4,000여 석을 갖추도록 하였다. 선조는 사명대사의 공로를 크게 인정하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의 벼슬을 내렸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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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임금께서 스님을궁중으로 초빙하여 자세하게 平生에 대한 일을 묻고는 下敎하여 이르되, “옛날 元나라의 劉秉忠과 明나라의 姚廣孝는 모두 山人인 스님의 신분이었으나, 나라에 큰 功勳을 세웠으므로 그 이름이 後世에까지 널리 流布되었습니다. 지금 國勢가 이와 같이 어려운 형편이니 스님이 만약 下山하여 머리를 기른다면 마땅히 百里의 食邑을 주는 한편 三軍의 統帥權을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으나, 스님은 감히 굳게 사양하고 물러났다. 宣祖가 무기고에 보관된鎧仗을 스님께 주었으므로 스님은 嶺南으로 돌아와서 남아 있는 倭賊을抄擊하고, 龍起·八公·金烏 등 여러 山城을 높고 굳게 쌓고, 그 山城의 要所마다 鎭地를 구축하고는 각각 藩鎭을 修飾하여 마친 후,印綏와 戰馬를 왕에게 되돌려 보내고 尺籍을 정리하여 備邊司에 보내고는 장서를 올려 한가롭게 수도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朝廷에서는 간곡히 만류하고 許諾하지 않았다.
丁酉年 겨울 明나라에서 원군으로 온 提督 麻貴를 따라島山 陣地에 들어갔고, 戊戌年에는 또 提督 劉挺을 따라 曳橋 陣地에 들어가서 모두 큰 공을 세웠는데, 前後에 걸쳐 軍粮을 준비하여 먹인 것이 무려 4천여 섬이고, 武器와 갑옷의 수도 한량이 없었다. 임금께서 크게 嘉賞하게 여기시고 종2품 嘉善大夫로 特進하고 同知中樞府事를 제수하였다.
辛丑年에 釜山城을 수축하고는內隱山으로 돌아갔으며, 癸卯年에는 王命을 받고 서울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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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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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 ↑ 양혜원, "유정(사명대사) (惟政)",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 ↑ 목정배,
"유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 사명 유정 지음, 이상현 옮김, 『사명대사집』, 동국대학교출판부, 2014, 9쪽.
- ↑ 사명 유정 지음, 이상현 옮김, 『사명대사집』, 동국대학교출판부, 2014, 9쪽.
- ↑ 사명 유정 지음, 이상현 옮김, 『사명대사집』, 동국대학교출판부, 2014, 9-10쪽.
- ↑ 손경희, "사명대사", 『디지털김천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 사명 유정 지음, 이상현 옮김, 『사명대사집』, 동국대학교출판부, 2014, 11쪽.
- ↑ 손경희, "사명대사", 『디지털김천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14 - 경남』, 돌베개, 2002. 온라인 참조: "사명대사 유정",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손경희, "사명대사", 『디지털김천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이지관,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102-137쪽.
- "해인사사명대사석장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