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철
혜철(惠哲) | |
대표명칭 | 혜철 |
---|---|
한자 | 惠哲 |
생몰년 | 785년(원성왕 1)-861년(경문왕 1) |
시호 | 적인(寂忍) |
호 | 혜철(慧徹) |
법명 | 혜철(惠哲) |
탑호 | 조륜청정(照輪淸淨) |
자 | 체공(體空) |
이칭 | 동리화상(桐裏和尙) |
성씨 | 박씨(朴氏) |
출신지 | 경상북도 경주 |
승탑 | 곡성 태안사 적인선사탑 |
정의
신라시대의 승려
내용
혜철은 어려서 출가하여 영주 부석사(浮石寺)에서 화엄학을 배우고, 806년(애장왕 7) 22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1] 선법이 전해지기 전인 814년(헌덕왕 6)에 당나라로 갔으며, 마조(馬祖)의 제자이자 남종선(南宗禪) 계통의 선사인 지장선사(地藏禪師) 문하에서 선법(禪法)을 전해 받았다.[2][3]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제9권의 기록에 의하면, 지장의 법통을 전수받은 자 넷 가운데 셋이 신라인으로서 계림의 도의선사(道義禪師), 신라국의 홍직선사(洪直禪師)와 혜선사(慧禪師)라고 적고 있으며, 혜철의 탑비에는 그가 지장을 만나서 한 말이 기록되어 있다.[4]
지장이 입적하자 공공산(龔公山)을 떠나 중국의 명산대찰(名山大刹)을 두루 순례하다가, 서주(西州) 부사사(浮沙寺)에 자리잡고 3년 동안 대장경을 열람한 다음 839년(문성왕 1)에 귀국하였다.[5] 귀국 후 쌍봉사(雙峰寺)에서 하안거(夏安居)를 지냈으며,[6] 대안사(大安寺)에서 법회를 베풀어 동리산파(桐裡山派)의 개조(開祖)가 되었다.[7] 이 때 문성왕은 때때로 사신을 보내어 설법과 정치의 정도를 청하여 물었다.[8]
혜철은 861년(경문왕 1) 77세의 나이로 입적하였으며, 탑비는 경문왕의 왕명으로 872년(경문왕 12)에 건립되었다.[9] 탑비는 현재 남아 있지 않으며, 화엄사에 소장된 사본(寫本)이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 수록되어 있다. 태안사에는 보물 제273호로 지정된 곡성 태안사 적인선사탑이 전해진다.
문도(門徒)로는 풍수도참설로 유명한 도선(道詵), 여선사(如禪師)와 광자대사(廣慈大師) 등 수백 인이 있다.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혜철",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김영길, "혜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혜철",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김영길, "혜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영길, "혜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쌍봉사",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혜철",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김영길, "혜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대안사적인선사조륜청정탑비(大安寺寂忍禪師照輪淸淨塔碑)",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소.
참고문헌
- 이지관, "곡성 대안사 적인선사 조륜청정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74-93쪽.
- 한국고대사회연구소, 「대안사 적인선사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3책 통일신라,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대안사 적인선사탑비 해석문",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