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해진
목차
정의
신라 흥덕왕 3년(828) 장보고가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 앞바다 장도에 설치한 해군기지이자 무역기지.
설명
완도는 신라·당나라·일본의 3국을 잇는 가장 중심이 되는 해상로의 요지에 위치한 곳으로, 828년(흥덕왕 3) 장보고는 이러한 완도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청해진을 건설하였다. 청해진 유적이 위치한 완도는 삼면의 조망이 확 트이고 수심이 깊어 선박을 대기가 쉬울 뿐만 아니라, 태풍을 피할 수도 있는 자연적 요새지이다. 청해진의 군영 본거지는 완도읍 장좌리 앞의 장군섬(將島)으로, 이곳 중앙에는 망대가 있어 멀리 남해안 일대와 해남·강진을 지나 당나라의 산둥반도로 출입하는 해로를 감시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장보고가 진을 설치한 후 청해진은 한․중․일의 삼각무역의 거점이 되었고, 나라의 중요한 제사인 중사(中巳)가 행해지는 장소 중 하나로『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1]. 중사가 행해진 기간은 장보고가 청해진을 경영하던 시기에 국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2]
국립문화재연구소의 1990년부터 -2001년까지 8차례에 걸친 장군섬과 인근 법화사(法華寺) 유적 발굴조사 결과, 성벽, 건물지, 매납유구, 섬입구의 "ㄷ"자형 판축유구와 우물, 섬입구 해안의 원목렬과 잔목렬 등이 확인되었다. 또한 토기, 기와, 중국 해무리굽청자 등 다양한 종류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846년 장보고는 중앙정부의 권련 다툼에 연루되어 염장(閻長))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그의 자제와 부장 이창진(李昌珍)이 남은 세력을 수습하여 일본에 상선단을 보내는 등 해외무역을 계속하면서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려 하였다. 이에 신라 중앙정부는 851년에 청해진을 파하고 그 주민을 벽골군(碧骨郡 : 전라북도 김제)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로써 청해진은 해군기지와 무역 거점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지식 관계망
외성문에서 바라본 완도[3]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장보고 | 청해진 | A는 B을 설치하였다 | 828년 |
염장 | 장보고 | A이 B를 살해하였다 | 846년 |
문성왕 | 청해진 | A은 B을 폐쇄하였다 | 851년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828년 |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였다 |
846년 | 염장이 장보고를 살해하였다 |
851년 | 문성왕이 청해진을 폐쇄하였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126.735127 | 완도 청해진 유적은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에 위치한다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 ↑ (그 외에) 속리악(俗離岳) 삼년산군(三年山郡), 추심(推心) 대가야군(大加耶郡), 상조음거서(上助音居西) 서림군(西林郡), 오서악(烏西岳) 결기군(結己郡), 북형산성(北兄山城) 대성군(大城郡), 청해진(淸海鎭) 조음도(助音島)이 있다. "삼국사기 잡지 제1, 중사로 지내는 기타 지역",
『한국사데이타베이스』, online 국사편찬위원회. - ↑ 강영철, 「완도의 역사적 고찰」,『張保皐의 新硏究』, 완도문화원. 1985.
- ↑ 민족기록화팀(2017년 04월 26일 촬영)
- ↑ 민족기록화팀(2017년 04월 26일 촬영)
- ↑ 민족기록화팀(2017년 04월 26일 촬영)
- ↑ 민족기록화팀(2017년 04월 26일 촬영)
- ↑ 민족기록화팀(2017년 04월 26일 촬영)
- ↑ 민족기록화팀(2017년 04월 26일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