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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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영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7월 16일 (일) 00:13 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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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543년~1605년까지 살았던 조선 중기의 서예가이다.

내용

어머니와의 솜씨겨루기 설화

한호은 서예솜씨가 매우 뛰었던 사람이었다. 때문에 그와 관련된 설화도 전해져온다. 한호가 절에서 글씨공부를 하던 도중에 집으로 오자, 그의 어머니가 불을 끄고 자신이 떡을 썰테니 한호에게는 글을 쓰라고 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떡을 정갈하게 썰었는데에 반해 한호는 삐뚤빼뚤 글을 써 자신의 실력이 부족한 것을 깨닫고 다시 돌아갔다고 한다. 이 설화는 조선시대 문헌에는 나오지 않으며 그의 고향인 송도(개성) 일대에서 구전된 이야기이다. [1]

한호의 생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풍비박산된 집안에서 한호는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서경덕의 소개로 신희남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2] 25살인 1567년(명종)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글씨로 출세하여 사자관(조선시대 승문원과 규장각에서 문서의 글자를 정자로 옮겨쓰는 일을 하던 벼슬)으로 국가의 여러문서와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도맡아 썼다. 중국에 사절이 갈 때도 함께 파견되었다.[3]이때 중국에서 명필로 알려지게 되었고 명대 후반의 저명한 학자 왕세정, 명의 사진 주지번 등이 한호의 글씨를 크게 칭찬하였다. 임진왜란이 참여한 명나라 장수와 사신들이 그의 글씨를 요청해 받아갈 정도였다고 한다. 국내에서는 조선 선조의 호평으로 크게 유명해였다. 국왕은 어선(御膳)과 어주(御酒)를 자주 하사했고, 사자관이던 그에게 문반 벼슬을 제수했다. 또 왕실교육용 천자문을 제작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다. 그런 배려로 한호는 정랑(正郞)과 가평(加平)군수 등을 역임할 수 있었다.[4]

한호의 작품활동

한호는 왕희지, 안진경의 서체를 익혀 각종 서체에 모두 뛰어났다. 한호는 기본적으로 왕희지체를 바탕으로하여 부분적으로 그 후대의 서체를 수용하였다. 특히 큰 글자일수록 후대의 서체를 수용한 경향이 크다. 예를 들면 해서 부분에서는 문진명의 서체를, 초서 부분에서는 회소, 축윤명, 장필 등의 서체를 수용했다. 한호의 서체는 여러 계층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천자문 (장서각본)』등이 조선말까지 수차례 간행되면서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왕실에서는 선조 이후의 어필을 비롯하여 왕실의 서체에 영향을 주었고, 문인계층에서는 친구와 후손을 중심으로 널리 전파되었다. 사자관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후대의 사자관들의 서풍에도 그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5]

주석

  1. 이완우, 「석봉 한호」, 『미술사논단』12, 한국미술연구소, 2001, 299쪽.
  2. 정성경, 「죽림 정사에서 한석봉을 길러 낸 어머니,『향토문화전자대전 영암향토문화백과』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김응현, 「한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김범, 「한호『네이버캐스트 인물한국사』online
  5. 이완우, 「석봉 한호」, 『미술사논단』12, 한국미술연구소, 2001, 318-319쪽.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 이병태, 『석봉 한호의 생애』, 석봉한호 기념사업회,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