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위 인각사 보각국사비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비 (軍威 麟角寺 普覺國師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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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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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Stele at Ingaksa Temple, Gunwi |
한자 | 軍威 麟角寺 普覺國師碑 |
주소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운문사길 264 |
문화재 지정번호 | 보물 제316호 |
문화재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
찬자 | 민지(閔漬) |
서자 | 왕희지 |
각자 | 미상 |
승려 | 일연(一然) |
승탑 |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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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경상북도 군위군 인각사에 있는 보각국사 일연(普覺國師 一然)의 비.
내용
개요
비는 1295년(충렬왕 21) 일연의 제자인 법진(法珍)에 의하여 세워졌다. 당시의 문장가인 민지(閔漬)가 왕명을 받들어 지은 명문이며, 글씨는 진나라까지 가서 왕희지의 유필(遺筆)을 집자(集字)하여 만들었다. 점판암 소재로 지금은 형체가 많이 훼손되었으나, 비문은 오대산 월정사에 사본이 있어 알 수 있다.[1] 글자는 비신의 전면에 150여 자가 남았고, 뒷면에는 100여 자가 현존한다.[2]
비문
전면
전면에는 일연의 생애가 기술되어 있다. 요약하면 경주에서 태어나 출가하여 승과에 급제하고 포산에서 수행하다 몽고 침공을 맞아 포산에 은거하고 선월사 오어사 인홍사 운문사 등에서 주석하다 국사가 되고 인각사에 물러나와 입적한다는 내용이다. 원 간섭기에 국사(國師)라 칭하지 못하고 국존(國尊)이라 한다고 하였으나 실제 비 제액에서는 보각국사라고 하는 등 칭호의 문제를 살필 수 있고, 입적하기 전에 제자들과 문답한 내용이 상세하며 『삼국유사』를 비롯하여 백 여권의 저술을 나열한 것도 특이하다.
후면
음기는 문인 산립(山立)이 지었는데 일연비를 세운 경위, 다비할 때의 영험담, 일연 문도에 대한 기록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 문도를 수록한 인명 기록에서는 제자를 법계에 따라 대선사, 선사, 산림, 삼중 순으로 열거하고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일연이 불교계에서 사상적 영향력이 컸으며, 다양한 선승들이 그의 문하로 몰려왔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3]
인각사보각국사비", 금석문세부정보,
비의 파손
비가 파손된 경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몇가지 기록을 통해 추정해볼 수 있다. 『동계집(東溪集)』에는 당시 수작으로 꼽히던 왕희지 글씨를 얻기 위해 수많은 탁본이 제작되는 과정에서 훼손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정유재란 때 절이 불타면서 파손되었다고 전한다.[4][5] 19세기 말에는 일연의 부도자리에 조부묘를 쓰고자 하였던 황보씨 일족이 승려들에게 저지당하자 절의 전각과 비석을 파괴하였다고 한다. [6]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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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위 인각사 보각국사비 | 일연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1295년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주석
- ↑ 국내관광진흥팀, "인각사", 구석구석여행지찾기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 한국관광공사. - ↑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탑 및 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조명제, 『한국금석문집성 25: 고려9 비문9』, 한국국학진흥원, 2014. 6~7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5", 한국금석문집성 25: 고려9 비문9,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 누리미디어. - ↑ "인각사보각국사비", 금석문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문화재청. - ↑ 임진왜란 때 이미 손상되었는데 그 사실을 몰랐는지 명에서는 사신을 통해 계속해서 비의 인본을 청했다고 한다. 진홍섭, 『묵재한화:한국미술사 외사』, 대원사, 2011. 온라인 참조: "인각사 보조국사 정조탑비", 묵재한화:한국미술사 외사,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 누리미디어. - ↑ 조명제, 『한국금석문집성 25: 고려9 비문9』, 한국국학진흥원, 2014. 5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5", 한국금석문집성 25: 고려9 비문9,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 누리미디어.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