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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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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지(閔漬)
대표명칭 민지
한자표기 閔漬
생몰년 1248년-1326년
본관 여흥(驪興)
시호 문인(文仁)
묵헌(默軒)
용연(龍涎)



정의

고려 후기의 문신.

내용

평장사 민영모(閔令謨)의 5대손이며, 아버지는 민휘(閔輝)이고, 광정대부 첨의찬성사(匡靖大夫僉議贊成事) 신사전(申思佺)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 민상정(閔祥正)과 민상백(閔祥伯) 그리고 딸 셋을 낳았다.[1]

1285년(충렬왕 11) 원나라가 다시 일본을 원정하려고 고려에 전함 건조를 요청하자, 좌부승선(左副承宣)으로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 일본 정벌의 무용함을 건의해 중지시켰다. 1290년(충렬왕 16) 당시 세자였던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원 조정에서 교지(交趾: 지금의 베트남)에 대한 용병을 논의하는 데 참여했다. 이때, 민지는 군사 동원보다 사신을 보내 항복하도록 하는 게 옳다고 했다. 이것으로 세조의 인정을 받아 한림직학사조열대부(翰林直學士朝列大夫)에 임명되었다.[2]

이제현(李齊賢)이 지은 묘지명이 남아 있다. 묘지명에 따르면 민지는 고종이규보(李奎報), 원종김구(金坵)에 필적할 정도였으며, 충렬왕 때 국가의 중요한 외교문서 작성을 전담할 정도로 문장이 뛰어났다고 한다.[3]

저술 및 작품

민지는 정가신(鄭可臣)이 지은 『천추금경록(千秋今鏡錄)』 7권을 권보(權溥)와 증수하여 태조 왕건의 조상인 호경대왕(虎景大王, 왕건의 5대조)부터 원종까지의 역사를 7권으로 적고 세계도(世係圖)를 붙인 『세대편년절요(世代編年節要)』와 국조(國祖) 문덕대왕(文德大王, 왕건의 3대조)부터 고종까지의 역사를 정리한 『본국편년강목(本國編年綱目)』 42권을 편찬했으나 모두 전하지 않는다. 저서로는 『금강산유점사사적기(金剛山楡岾寺事蹟記)』, 『묵헌집(默軒集)』이 있다.[4]

비문의 찬자

민지가 지은 비문으로,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비(軍威 麟角寺 普覺國師碑)가 있다.

지식 관계망

  •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비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비 민지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세대편년절요 민지 A는 B가 저술하였다
본국편년강목 민지 A는 B가 저술하였다
금강산유점사사적기 민지 A는 B가 저술하였다

주석

  1. 신안식, "민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민지",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3. "민지묘지명",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4. 신안식, "민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신안식, "민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민지",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민지묘지명",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국역 고려사: 열전』, 경인문화사, 2006. 온라인 참조: "민지", 국역 고려사: 열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