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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회암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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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규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4월 12일 (수) 17:37 판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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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회암사지
(楊州 檜巖寺址)
대표명칭 양주 회암사지
한자 楊州 檜巖寺址
주소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14
문화재 지정번호 사적 제 128호
문화재 지정일 1964년 6월 10일
건립시기 1328년(충숙왕 15)
창건자 지공
경내문화재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 석등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지리산에 있는 절.[1]


개요

역사

회암사가 정확히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으나,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1174년(고려 명종 4) 금나라의 사신이 회암사에 왕래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12세기쯤 창건된 것으로 추정한다.[2] 그 뒤 1328년(충숙왕 15) 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 들어온 지공이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를 본떠서 266칸의 대규모 사찰로 중창하였으며, 1378년(우왕 4) 나옹이 중건하였다 한다. [3] 이 같은 내용은 고려 말에 목은 이색이 쓴 《천보산회암사수조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총 262칸에 전각들로 이루어진 회암사의 가람은 동방에 제일이며 법당에는 15척(4.5m)의 불상 7구와 10척(3m)의 관음상이 봉안되어 있다고 했다.[4]

조선 태조는 나옹의 제자인 무학대사를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여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찬례토록 하였으며, 왕 위에서 물러난 뒤에는 친히 회암사에 머물면서 수도생활을 했다. 그 뒤로도 회암사는 조선 왕실과 지속적인 인연을 맺어오다가 명종 때 보우가 머물면서 다시 번창하게 된다. 하지만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의 후원으로 기세를 올리던 보우는 문정왕후가 죽은 뒤로 제주도로 유배되어 살해되었고, 문정왕후와 보우에 대한 유생들의 반감이 회암사를 폐사시켰다.[5] 이후 대사찰이 폐사되면서 순조 21년(1821년)에 이응준이란 자가 술사 조대진의 말을 듣고 이 곳 법당자리에 선친의 묘소를 옮기기 위하여 절터에 남아있던 지공과 무학의 비를 철거하였으나 이 사실이 알려지자 나라에서 두 사람을 섬으로 유배하고 순조 28년(1828)에 비를 원래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1922년에는 봉선사 주지 홍월초화상이 새로 보전을 지어 불상을 봉안하고 지공, 나옹, 무학의 세 화상의 진영을 모셨다고 한다. 이후 1977년에 호선이 서북쪽에 큰 법당을 지어 오늘의 회암사에 이르게 되었다.[6]

동영상


갤러리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722년 삼법이 쌍계사(옥천사)를 창건하였다.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하동 쌍계사 A는 B에 있다

참고문헌

주석

  1. "양주 회암사지", 조유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수정일: 2013년 10월 14일
  2. "조선 불교의 흥망성쇠 현장으로- 양주 회암사지" 국내관광진흥팀,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한국관광공사. 최종수정일: 2016년 9월 19일
  3. "회암사", 한정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4월 12일
  4. "조선 불교의 흥망성쇠 현장으로- 양주 회암사지" 국내관광진흥팀,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한국관광공사. 최종수정일: 2016년 9월 19일
  5. "조선 불교의 흥망성쇠 현장으로- 양주 회암사지" 국내관광진흥팀,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한국관광공사. 최종수정일: 2016년 9월 19일
  6. "양주 회암사지" 국내관광진흥팀,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한국관광공사. 최종확인: 2017년 4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