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왕사 낙진(元景王師 樂眞)은 1050년(문종 4)에 태어났으며, 그의 선조는 이천군(利川郡)의 우족(右族)[1]이었다.[2]
속성은 신씨(申氏)이고, 이름은 낙진(樂眞)이며, 자(字)는 자정(子正)이다. 그의 선세(先世)는 남(南) (결락) 이천군(利川郡)의 우족(右族)이었다. 스님께서 탄생한지 몇 달만에 그의 어머니가 (결락) 문전(門前)에 어떤 이상한 스님이 이르러 와서 이르기를, "이 아들은 숙질(淑質)을 받아 태어났으므로, 출가(出家)하여 스님이 되면 반드시 훌륭한 법기(法器)가 될 것이니, 잘 보호하여 키우라"고 하였다.
(결락) 지의귀(志依歸) (결락) 승통(僧統) 균찬(均粲)에 의하여 삭발하고 스님이 되었다. (결락) 또 경덕국사(景德國師)에게서 수학하였다. 청령(淸寧) 2년 병신세(丙申歲)에 (결락) 사(寺)에 나아가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함옹(咸雍) 4년 무신세(戊申歲)에는 대선장(大選場)에 합격하여 대덕(大德) 법계(法階)를 받았다. 이로부터 경덕(景德)의 문하(門下)를 떠나지 아니하고 수학하였다.
경덕국사가 입적하고, 대각국사가 경덕국사의 법통(法統)을 계승하였다. 왕사는 경덕문인(景德門人)으로 (결락) 강하(講下)에서 수학하였다. 대각국사는 일찍부터 원경(元景)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었다. 인위상(引爲上) (결락) 지기강(之紀綱). 문정(門庭) (결락) 무소굴(無所屈) (결락) 대각국사가 원경과 더불어 이야기할 때에는 흔연(欣然)히 그의 의견(意見)을 청납(聽納)하지 않음이 없었다. 왕사도 또한 지기(知己)를 만났다고 기꺼워하였다. 사(思) (결락) 대각국사가 일찍 위로하여 말하기를, "그대의 지극한 정성으로 불법(佛法)을 받드는 신심(信心)이 아니었더라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이 되었겠는가"라 하였다.
숙왕(肅王)이 번저(藩邸)에 있을 때, (결락) 도량(道場)을 개설하고, 왕사를 청하여 강주(講主)로 모셨는데, 도속(道俗)의 청중이 무려 수백명에 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명성(名聲)이 더욱 널리 떨쳤다. 증시(曾是) 대각(大覺) (결락) "밝지 않음이 이미 오래되었다. 내가 송(宋)나라에 가서 유학(遊學)하여 그 법(法)을 얻고자 하니, 나를 따라갈 자 오직 자네뿐이라"고 했다. 이때 왕사가 이르기를 (결락) 학(學) (결락) 여러 차례에 걸쳐 문종(文宗)에게 유학할 것을 주청(奏請)하였으나, 마침내 공식 허가(許可)를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국사의 구법(求法) 의지(意志)는 견고할 뿐아니라 '심분분(心憤憤) 구비비(口悱悱)'하여 그의 뜻을 꺾을 수 없었으며, 또한 그의 원력(願力)은 점점 더욱 굳어져 (결락) 마침내 상선(商船)을 얻어 타고 미복(微服)으로 바다를 건너게 되었다. 문종이 이 소식을 듣고 경탄(驚歎)하여 원경왕사(元景王師)에게 명(命)하되, 왕사(王師)와 대사(大師)인 혜선(慧宣)과 도린(道隣) 등을 추종(追從)토록 하였다.
자중하(自仲夏) (결락) 대각(大覺). 7월(七月) ▨일일(▨一日) 대각국사(大覺國師)를 따라 송(宋)의 경사(京師)에 이르러 철종황제(哲宗皇帝)를 배알하였는데 황제의 대우(待遇)가 매우 융숭하였다. (결락) 왕사가 국사의 뒤를 따라 화엄종(華嚴宗)의 유성법사(有誠法師)를 만나 교리(敎理)를 청해 듣고 계발(啓發)된 바가 많았다. 항주(杭州) 혜인원(惠因院)의 진수법사(晉水法師)는 처음 만난 초면이었지만, 오래전부터 친한 구면처럼 느껴져서 항상 온안(溫顔)으로 친절히 대해주었다. (결락) 원외랑(員外郞)인 양걸(楊傑)이 소문을 듣고 이르기를, "자정(子正)의 학문이 박식다문(博識多聞)하여 참으로 사람들의 스승이 될 만한 스님이다"라고 칭송하였다. (결락) 술사(述士) (결락) 근자(近者)에 다시 법계(法階)를 첨가(添加)하는 고래(誥勑)을 받았으니, 앞으로 멀지않아 마땅히 왕사가 될 것이라고 했다.
대각국사가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고 속장경(續藏經)을 판각할 때 교정을 맡아 보았다. (결락) 대각국사가 왕에게 상언(上言)하되, "근고(近古) 이래로 제종(諸宗)의 장소(章䟽)가 다분히 그 책이 일실(逸失)되었사오니, 청하옵건대 그 책들을 구입하여 (결락) 케 하여 주시옵소서"라 했다. 원경왕사 등 의학(義學)에 속하는 명승(名僧)을 한 자리에 모아 서로 더불어 교정(校正)하고 각공(刻工)에 명하여 판각(板刻)함으로써 이미 일실(逸失)된 경전이 다시 세상에 유행(流行)케 되었으니, 이는 오로지 왕사의 힘이 크게 작용한 것이라 하겠다. (결락) 사기등잡문(事記等雜文). 성지(聖旨)를 받들어 사(賜) (결락) 석원사림(釋苑詞林) (결락) 원종문류(圓宗文類)는 문인(門人)으로 수좌(首座)인 각순(覺純) 등이 거듭 상정(詳定)을 더하여 부류별로 나누어 엮어 250권으로 하고 금년(今年: 1101~1108 사이)에 끝을 맺었다.
갑오년(甲午年) 3월 예종(睿宗)이 봉은사(奉恩寺)에 행행(幸行)하여 배(拜) (결락) 임금께서 왕사로 모시고자 하였으나, 스님은 간절히 사양하였다. 이(而) (결락) 그리하여 또 '오공통혜(悟空通慧)'란 법호(法號)를 첨가(添加)하였다. 왕사의 법호가 최초에는 '자응구리(慈應究理)'라고 받았는데, 그 후로부터 연오(演奧)·정관(正觀)·원응(圓應)·법인(法印) 등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첨가를 받았다. 그리고 이제 또 오공통혜(悟空通慧)라는 사자(四字)를 가한 것은 모두 왕사의 덕행(悳行)을 나타낸 것이다. 식자(識者)들은 왈양(曰楊) (결락) 객우(客尤) (결락) 예종(睿宗)께서 귀법사(歸法寺)로써 스님의 연식(燕息)할 장소로 삼고, 법수사(法水寺)로써 왕사가 향화(香火)를 받들면서 기도하는 처소로 삼게 하였다.
1119년(예종 14) 낙진은 귀법사(歸法寺)에서 나이 70세, 승랍 62세로 입적했다. 이에 예종은 제문(祭文)을 지어 위로하고, 시호를 '원경(元景)'이라 추증했다. 다비는 귀법사 서쪽 산기슭에서 행하였으며, 1120년(예종 15)에는 왕의 명에 따라 신좌(神座)를 야로현(冶爐縣: 경남 합천)의 반야사(般若寺)로 옮겨 안치했다.[11]
병을 앓게 되어 왕이 어의(御醫)를 보내어 치료케 하였으나, 스님은 이르기를, "노인(老人)의 병은 인간의 자연적인 상태이므로 번거롭게 다스릴 것이 없다"면서 수치(受治)를 거부하였다. 3월 3일 (결락) 쌍석(雙舃)은 사가(私家)의 문턱을 밟지 아니하고, 육근(六根)은 욕계(欲界)의 티끌에 얽매이지 않으니, 이것은 내 스스로 다짐한 바이지만, 자네들도 공지(共知)할 사항이다. 국가에서 용렬하고 덕(德)이 없는 나를 왕사로 하여 과록(過錄)하면, 임금님의 체면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한(恨)스러운 바는 덕은 박하고 재주는 얕아서 (결락) 이(以) (결락) 금자(今者) (결락) 임종의 유훈(遺訓)을 마치시고 곧 입멸(入滅)하였으니, 속수(俗壽)는 70이요, 법하(法夏)는 62세였다. 임금께서 부음(訃音)을 들으시고 크게 진도(震悼)하여 시신(侍臣)을 보내 제문(祭文)을 지어 위로하고 많은 부의금과 장례물(葬禮物)을 보냈으며, 시호(諡號)를 원경(元景)이라 추증하였다. 그리고 (결락) 에게 명하여 장사(葬事)를 감호(監護)케 하였다. 이달 6일 귀법사(歸法寺) 서쪽 산기슭에서 다비(茶毗)하였다. (결락) 도(道) (결락) 원(院). 경자년(庚子年) 10월에 이르러 신좌(神座)를 합천관내(陜川管內) 야로현(冶爐縣) 반야사(般若寺)로 옮겨 절의 동남쪽 산등성이에 안치하였으니, 이는 왕의 근본 교지(敎旨)에 의한 것이다.
1125년(인종 3) 낙진의 문인인 각순(覺純)은 조정에 탑비 건립을 청했고, 이에 인종은 김부일(金富佾)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도록 하였다.[12] 글씨는 이원부(李元符)가 쓰고, 김윤(金允)이 새겼다. 현재 탑비는 해인사의 일주문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1963년 보물 제128호로 지정되었다.
인종(仁宗) 임금께서 즉위(卽位)하신지 3년만에 원경왕사(元景王師)의 문인(門人)인 수좌(首座) 각순(覺純) 등이 조정에 고(告)하여 이르기를, "왕사(王師)께서 입적(入寂)하여 장례를 지낸지도 이미 여러 해가 되었나이다. 이젠 마땅히 비(碑)를 세워 왕사의 위대하신 업적(業跡)이 인멸되지 않도록 배려(配慮)하여 주십시오"라고 주청(奏請)하였다. 이위(以爲) (결락) 유이(惟爾). "왕사가 (결락) 예종대(睿宗代)에 능히 화엄대교(花嚴大敎)로써 국가를 보익(補益)케 함이 많았으니,내 어찌 감히 그 은혜를 잊을 수 있겠는가”라 하시고, 이에 신(臣) 부일(富佾)에게 명(命)하여 이르시기를, "경(卿)이 왕사의 비명(碑銘)을 지으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