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근정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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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거나 정령(政令)을 반포하는 정전(正殿)으로, 때로는 사신을 맞아들이기도 하고 양로연(養老宴)이나 위로연을 베풀기도 하던 곳이다.<ref>김동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442 경복궁 근정전(景福宮勤政殿)]",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거나 정령(政令)을 반포하는 정전(正殿)으로, 때로는 사신을 맞아들이기도 하고 양로연(養老宴)이나 위로연을 베풀기도 하던 곳이다.<ref>김동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442 경복궁 근정전(景福宮勤政殿)]",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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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재의 건물은 1867년 중건된 | + | 현재의 건물은 1867년 중건된 것이다. [[경복궁]] 창건 당시인 1395년(태조 4)에 지은 건물이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270여 년 만에 다시 지었다. 중건 당시 태조 때의 건물을 원래대로 복구하지 않고 회랑(廻廊)을 단랑(單廊)에서 복랑(複廊)으로 바꾸고 월대(月臺: 궁전 앞에 있는 섬돌)도 새로 만드는 등 변화가 있었다. 현재의 근정전은, 경복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2000년부터 진행되어온 보수공사의 결과이다. 보수 전 근정전에서는 근정전의 보수는 건물을 지탱해주는 고주(高柱, 높은 기둥) 4개의 맞춤부분이 벌어지고 용마루와 처마가 처지는 등의 문제점이 발견되어 1층의 연목과 2층에 해당하는 부분을 완전히 해체하여 재조립한 대규모 공사로, 2000년 1월부터 2003년 10월까지 46개월에 걸쳐 약 72억 원의 사업비를 투입하여 완료하였다.<ref>김동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442 경복궁 근정전(景福宮勤政殿)]",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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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는 아홉 겹으로 겹친 운궁(雲宮: 살미 내부의 중첩된 부분)으로 처리하였다. 건물 안쪽에서 볼 때 위층은 아래층 퇴보[退樑]와 내목도리(內目道里) 및 멍에창방을 짜맞춘 곳 위에 위층 평주를 놓고 아래층과 똑같은 공포로 짜 올렸다. 내부 고주(高柱)는 중간부분을 바깥두리기둥에서 퇴보로 연결하였고 이 퇴보와 뜬창방 사이의 상부 둘레에는 당초문을 조각한 낙양을 둘렀으며 이 뜬창방 위로는 머름을 두고 운궁으로 치장하였다. 내진고주(內陣高柱)의 상부는 다시 창방·안초공 및 주두(柱頭: 대접받침)를 두었다. 이 위에 우물천장[格字天障]을 가설했는데, 천장 중심부에는 장방형 틀을 돌리고 다출목의 작은 포작을 다포식으로 틀어올려 천개를 마련하고 구름무늬 사이에 쌍룡과 여의보주를 조각하였다. 팔작지붕의 내림마루와 추녀마루·용마루에는 모두 회반죽을 발랐는데, 용마루 양끝에는 취두(鷲頭: 매 머리모양의 장식)를, 추녀마루 위에는 용두(龍頭)와 잡상(雜像)을 배열하였고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 龍頭·鬼頭 모양의 장식)를 끼웠다. 건물의 외부 정면 좌우에는 청동제 향로를 놓았으며 정면 서쪽계단 옆에는 무쇠로 만든 드므(넓적하게 생긴 독)를 두었다. 드므에 물을 담아두어 이 물에 화기(火氣)의 얼굴이 비치면 놀라 숨거나 움츠리어 화기가 진압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또한, 근정전에서 근정문에 이르는 어도(御道) 좌우에는 정1품부터 정9품까지의 품계를 새긴 품계석(品階石)을 배열하였으며 차일(遮日)을 칠 때 사용하였던 차일고리가 앞마당에 남아 있다. | 공포는 아홉 겹으로 겹친 운궁(雲宮: 살미 내부의 중첩된 부분)으로 처리하였다. 건물 안쪽에서 볼 때 위층은 아래층 퇴보[退樑]와 내목도리(內目道里) 및 멍에창방을 짜맞춘 곳 위에 위층 평주를 놓고 아래층과 똑같은 공포로 짜 올렸다. 내부 고주(高柱)는 중간부분을 바깥두리기둥에서 퇴보로 연결하였고 이 퇴보와 뜬창방 사이의 상부 둘레에는 당초문을 조각한 낙양을 둘렀으며 이 뜬창방 위로는 머름을 두고 운궁으로 치장하였다. 내진고주(內陣高柱)의 상부는 다시 창방·안초공 및 주두(柱頭: 대접받침)를 두었다. 이 위에 우물천장[格字天障]을 가설했는데, 천장 중심부에는 장방형 틀을 돌리고 다출목의 작은 포작을 다포식으로 틀어올려 천개를 마련하고 구름무늬 사이에 쌍룡과 여의보주를 조각하였다. 팔작지붕의 내림마루와 추녀마루·용마루에는 모두 회반죽을 발랐는데, 용마루 양끝에는 취두(鷲頭: 매 머리모양의 장식)를, 추녀마루 위에는 용두(龍頭)와 잡상(雜像)을 배열하였고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 龍頭·鬼頭 모양의 장식)를 끼웠다. 건물의 외부 정면 좌우에는 청동제 향로를 놓았으며 정면 서쪽계단 옆에는 무쇠로 만든 드므(넓적하게 생긴 독)를 두었다. 드므에 물을 담아두어 이 물에 화기(火氣)의 얼굴이 비치면 놀라 숨거나 움츠리어 화기가 진압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또한, 근정전에서 근정문에 이르는 어도(御道) 좌우에는 정1품부터 정9품까지의 품계를 새긴 품계석(品階石)을 배열하였으며 차일(遮日)을 칠 때 사용하였던 차일고리가 앞마당에 남아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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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와 평가=== | ===의의와 평가=== | ||
조선 중기 이후 차츰 기술적 세련미를 잃어가던 수법을 가다듬어 완성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며, 아울러 조선의 가장 큰 궁궐의 정전이라는 점에도 의미가 있다. 그러나 양식과 수법·의장 등과 단청의 색조·무늬 등을 모두 앞서 지어진 [[창덕궁 인정전|창덕궁 인정전(昌德宮 仁政殿)]] 양식을 본떴으나 충분히 소화시키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ref>김동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442 경복궁 근정전(景福宮勤政殿)]",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조선 중기 이후 차츰 기술적 세련미를 잃어가던 수법을 가다듬어 완성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며, 아울러 조선의 가장 큰 궁궐의 정전이라는 점에도 의미가 있다. 그러나 양식과 수법·의장 등과 단청의 색조·무늬 등을 모두 앞서 지어진 [[창덕궁 인정전|창덕궁 인정전(昌德宮 仁政殿)]] 양식을 본떴으나 충분히 소화시키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ref>김동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442 경복궁 근정전(景福宮勤政殿)]",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2017년 11월 25일 (토) 00:18 판
경복궁 근정전 (景福宮勤政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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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경복궁 근정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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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景福宮勤政殿 |
유형 | 유적, 궁궐 |
시대 | 조선/1396년 |
지정번호 | 국보 제223호 |
지정일 | 1985년 1월 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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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경복궁의 정전(正殿)으로, 조선 후기의 전각. [1]
내용
구조
정면 5칸, 측면 5칸의 팔작지붕 중층건물로 공포(栱包)는 다포계(多包系)이고, 구조는 전후 툇간 11량(前後退間十一樑)구조이다.[2]
성격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거나 정령(政令)을 반포하는 정전(正殿)으로, 때로는 사신을 맞아들이기도 하고 양로연(養老宴)이나 위로연을 베풀기도 하던 곳이다.[3]
역사적 변천
현재의 건물은 1867년 중건된 것이다. 경복궁 창건 당시인 1395년(태조 4)에 지은 건물이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270여 년 만에 다시 지었다. 중건 당시 태조 때의 건물을 원래대로 복구하지 않고 회랑(廻廊)을 단랑(單廊)에서 복랑(複廊)으로 바꾸고 월대(月臺: 궁전 앞에 있는 섬돌)도 새로 만드는 등 변화가 있었다. 현재의 근정전은, 경복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2000년부터 진행되어온 보수공사의 결과이다. 보수 전 근정전에서는 근정전의 보수는 건물을 지탱해주는 고주(高柱, 높은 기둥) 4개의 맞춤부분이 벌어지고 용마루와 처마가 처지는 등의 문제점이 발견되어 1층의 연목과 2층에 해당하는 부분을 완전히 해체하여 재조립한 대규모 공사로, 2000년 1월부터 2003년 10월까지 46개월에 걸쳐 약 72억 원의 사업비를 투입하여 완료하였다.[4]
의의와 평가
조선 중기 이후 차츰 기술적 세련미를 잃어가던 수법을 가다듬어 완성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며, 아울러 조선의 가장 큰 궁궐의 정전이라는 점에도 의미가 있다. 그러나 양식과 수법·의장 등과 단청의 색조·무늬 등을 모두 앞서 지어진 창덕궁 인정전(昌德宮 仁政殿) 양식을 본떴으나 충분히 소화시키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5]
지식 관계망
- 명성황후 상존호옥책문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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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근정전 | 명성황후 상존호옥책문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주석
- ↑ 김동현, "경복궁 근정전(景福宮勤政殿)",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동현, "경복궁 근정전(景福宮勤政殿)",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동현, "경복궁 근정전(景福宮勤政殿)",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동현, "경복궁 근정전(景福宮勤政殿)",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동현, "경복궁 근정전(景福宮勤政殿)",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단행본
- 정광순, 종로문화원, 『(조선의 정궁)경복궁 . 2007년』, 종로문화원, 2007
- 신응수, 『경복궁 근정전』, 현암사, 2005.
- 허균, 『(사료와 함께)새로 보는 경복궁』, 한림미디어, 2005.
- 신영훈, 김대벽, 『조선의 정궁 경복궁』, 조선일보사, 2003.
- 문화재관리국, 『朝鮮朝王宮 重要建築物指定調査書』, 한국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84.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特別市史 : 古蹟篇』,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63.
- 장대원, 『景福宮 重建에 對한 小攷』,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