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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운리(용문리) 가마터는 대부분 10세기 후반부터 11세기 중엽까지의 초기 | + | 용운리(용문리) 가마터는 대부분 10세기 후반부터 11세기 중엽까지의 초기 가마터이다. 중국의 [[월주요]](越州窯)·[[요주요]](耀州窯)·[[유요]](汝窯)와의 관계를 말해주는 파편들이 여러 곳에서 나왔다. 완전한 비색(翡色)에 이르지 못한 청자색과 [[월주요]]·[[요주요]]·[[유요]] 등과 비슷한 기형문양(器型文樣)을 찾아볼 수 있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25454 강진 고려청자 요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
===계율리 가마=== | ===계율리 가마=== | ||
− | 계율리는 계치·청룡·난산·율촌마을을 총칭하는데, 현재 40여 개소의 | + | 계율리는 계치·청룡·난산·율촌마을을 총칭하는데, 현재 40여 개소의 가마터가 남아 있다. 일부는 계치의 동쪽 골짜기의 저수지에 수몰되고 논으로 변한 곳도 있으나, 대체로 잘 보존되어 있다. 계율리의 가마는 용운리와 같이 오래된 방식도 있으나 대체로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의 가마로서 양식화된 상감청자 조각이 많이 발견되고 있어, 대구면 내의 가마가 땔나무를 찾아 아래, 위로 이동하였던 것을 나타낸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1415 강진고려청자요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수동리 가마=== | ===수동리 가마=== | ||
− | 수동리는 사당리 남쪽에 위치하며, 5∼6개의 가마터가 있다. 대체로 14세기경의 것으로 일부는 하천에 침식되고, 일부는 전답으로 변하였다. 주로 대접·발(鉢)·접시·병·매병·잔·합·호·기와·향로 등의 청자류와 철회(鐵繪)·진사(辰砂)·철채·흑유·백자·퇴화청자 | + | 수동리는 사당리 남쪽에 위치하며, 5∼6개의 가마터가 있다. 대체로 14세기경의 것으로 일부는 하천에 침식되고, 일부는 전답으로 변하였다. 주로 대접·발(鉢)·접시·병·매병·잔·합·호·기와·향로 등의 청자류와 철회(鐵繪)·진사(辰砂)·철채·흑유·백자·퇴화청자 등 거의 모든 기법의 도자기 파편이 출토되었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25454 강진 고려청자 요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
===사당리 가마=== | ===사당리 가마=== | ||
− | 사당리 가마터는 약 40여 개소로, 당전(堂前)과 백사(白沙) 부락의 용문천가에 있는 일부분이 하천의 침식으로 | + | 사당리 가마터는 약 40여 개소로, 당전(堂前)과 백사(白沙) 부락의 용문천가에 있는 일부분이 하천의 침식으로 없어졌다. 전답으로 된 곳이 대부분이어서 그 보존상태도 매우 나쁘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25454 강진 고려청자 요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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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9일 (일) 09:29 판
강진고려청자요지 (康津高麗靑瓷窯址) |
|
대표명칭 | 강진고려청자요지 |
---|---|
한자표기 | 康津高麗靑瓷窯址 |
이칭 | 강진고려청자도요지(康津高麗靑瓷陶窯址) |
유형 | 가마터 |
시대 | 고려 |
지정번호 | 사적 제68호 |
지정일 | 1963년 01월 21일 |
소장처 |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용운리, 계율리, 수동리 |
|
목차
정의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용운리·계율리·수동리 일대에 있는 고려시대의 청자요지군이다.[1]
내용
대구면 강진고려청자요지는 고려시대 전체에 걸쳐 시기별로 총망라되어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각 가마의 구조에서도 시기별 특색을 잘 보여 주고 있다.[2]
용운리(용문리) 가마
용운리(용문리) 가마터는 대부분 10세기 후반부터 11세기 중엽까지의 초기 가마터이다. 중국의 월주요(越州窯)·요주요(耀州窯)·유요(汝窯)와의 관계를 말해주는 파편들이 여러 곳에서 나왔다. 완전한 비색(翡色)에 이르지 못한 청자색과 월주요·요주요·유요 등과 비슷한 기형문양(器型文樣)을 찾아볼 수 있다.[3]
계율리 가마
계율리는 계치·청룡·난산·율촌마을을 총칭하는데, 현재 40여 개소의 가마터가 남아 있다. 일부는 계치의 동쪽 골짜기의 저수지에 수몰되고 논으로 변한 곳도 있으나, 대체로 잘 보존되어 있다. 계율리의 가마는 용운리와 같이 오래된 방식도 있으나 대체로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의 가마로서 양식화된 상감청자 조각이 많이 발견되고 있어, 대구면 내의 가마가 땔나무를 찾아 아래, 위로 이동하였던 것을 나타낸다.[4]
수동리 가마
수동리는 사당리 남쪽에 위치하며, 5∼6개의 가마터가 있다. 대체로 14세기경의 것으로 일부는 하천에 침식되고, 일부는 전답으로 변하였다. 주로 대접·발(鉢)·접시·병·매병·잔·합·호·기와·향로 등의 청자류와 철회(鐵繪)·진사(辰砂)·철채·흑유·백자·퇴화청자 등 거의 모든 기법의 도자기 파편이 출토되었다.[5]
사당리 가마
사당리 가마터는 약 40여 개소로, 당전(堂前)과 백사(白沙) 부락의 용문천가에 있는 일부분이 하천의 침식으로 없어졌다. 전답으로 된 곳이 대부분이어서 그 보존상태도 매우 나쁘다.[6]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강진고려청자요지 | 고려청자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강진고려청자요지 | 월주요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강진고려청자요지 | 요주요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강진고려청자요지 | 유요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 대한뉴스 제 1171호-고려청자 재현(게시일: 2016년 12월 8일)
- 대한뉴스 제 1347호-비색 천년의 옛터(게시일: 2016년 12월 8일)
주석
- ↑ "강진고려청자요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강진고려청자요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강진 고려청자 요지",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 ↑ "강진고려청자요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강진 고려청자 요지",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 ↑ "강진 고려청자 요지",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웹자원
- "강진고려청자요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강진 고려청자 요지",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 "강진고려청자요지",
더 읽을거리
- 웹자원
- "강진 고려청자 요지", 대한민국 구석구석,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 한국관광공사. 온라인 참조: "강진 고려청자 요지", 대한민국 구석구석,『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강진 고려청자 도요지", 한반도 해양문화,
『문화콘텐츠닷컴』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2010. 온라인 참조: "강진 고려청자 도요지", 문화원형백과-한반도 해양문화,『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강진 고려청자 요지", 대한민국 구석구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