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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광해군|광해군]] 때에 제주목사, 함경도 북병사(北兵使) 등을 지낸 [[이괄]]은 [[인조반정]] 때 큰 공을 세웠음에도 2등공신으로 책봉되고 더구나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임명되어 외지에 부임하게 되었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55851 이괄의 난]",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 + | [[조선 광해군|광해군]] 때에 제주목사, 함경도 북병사(北兵使) 등을 지낸 [[이괄]]은 [[인조반정]] 때 큰 공을 세웠음에도 2등공신으로 책봉되고 더구나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임명되어 외지에 부임하게 되었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55851 이괄의 난]",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반정을 주도해 정권을 장악한 공신들은 반대 세력에 대한 경계가 심해 서로 고변하여 반역음모 혐의로 잡히는 자가 적지 않았다. [[이괄]]도 1624년 1월 변란을 꾀한다는 고발을 받았고 [[조선 인조|인조]]는 조사를 위해 [[이괄]]의 외아들을 서울로 압송해 오라 명령하였다. [[이괄]]은 이에 조정의 사자(使者)들의 목을 베고 반란을 일으킨다.<ref>하현강,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3666 이괄의 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경과=== | ===경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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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괄의 난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안팎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안으로는 국내의 반란으로 국왕이 서울을 떠난 사태는 처음 있었던 일로 집권층, 일반민중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밖으로는 후금의 남침 야욕을 자극시키기도 하였다. 반란이 실패하자 [[한명련]]의 아들인 [[한윤(조선)|윤]](潤) 등이 후금으로 도망해 국내의 불안한 정세를 알리며 남침을 종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의 원인이 되었다.<ref>하현강,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3666 이괄의 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 이괄의 난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안팎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안으로는 국내의 반란으로 국왕이 서울을 떠난 사태는 처음 있었던 일로 집권층, 일반민중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밖으로는 후금의 남침 야욕을 자극시키기도 하였다. 반란이 실패하자 [[한명련]]의 아들인 [[한윤(조선)|윤]](潤) 등이 후금으로 도망해 국내의 불안한 정세를 알리며 남침을 종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의 한 원인이 되었다.<ref>하현강,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3666 이괄의 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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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8일 (토) 10:29 판
이괄의 난(李适─亂) | |
대표명칭 | 이괄의 난 |
---|---|
한자표기 | 李适─亂 |
유형 | 반란 |
시대 | 조선 |
날짜 | 1624년 1월 ~ 1624년 2월 15일 |
관련인물 | 조선 인조,임경업 |
관련단체 | 승정원 |
관련유물유적 | 창경궁,창덕궁 |
목차
정의
조선시대인 1624년(조선 인조 2)에 이괄, 한명련 등이 일으킨 반란 사건이다.[1]
내용
배경
광해군 때에 제주목사, 함경도 북병사(北兵使) 등을 지낸 이괄은 인조반정 때 큰 공을 세웠음에도 2등공신으로 책봉되고 더구나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임명되어 외지에 부임하게 되었다.[2]반정을 주도해 정권을 장악한 공신들은 반대 세력에 대한 경계가 심해 서로 고변하여 반역음모 혐의로 잡히는 자가 적지 않았다. 이괄도 1624년 1월 변란을 꾀한다는 고발을 받았고 인조는 조사를 위해 이괄의 외아들을 서울로 압송해 오라 명령하였다. 이괄은 이에 조정의 사자(使者)들의 목을 베고 반란을 일으킨다.[3]
경과
이괄은 모반 혐의로 서울로 압송 중이던 구성부사 한명련을 중도에서 구해내어 반란에 가담시켰고, 곧장 서울로 진군하였다. 2월 11일 이괄군은 마침내 서울에 입성, 경복궁의 옛터에 주둔하였고 인조 이하 대신들은 공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각지에서 조정을 지원하는 병력이 속속 서울에 도착함에 따라 수도 점거에 실패하고, 삼전도를 거쳐 광주(廣州)로 달아났다. 2월 15일 밤 이천의 묵방리(墨坊里)에 이르렀을 때, 부하 장수들의 배반으로 이괄과 한명련 등은 그들에게 목이 잘리고 말았다.[4]
결과 및 영향
이괄의 난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안팎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안으로는 국내의 반란으로 국왕이 서울을 떠난 사태는 처음 있었던 일로 집권층, 일반민중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밖으로는 후금의 남침 야욕을 자극시키기도 하였다. 반란이 실패하자 한명련의 아들인 윤(潤) 등이 후금으로 도망해 국내의 불안한 정세를 알리며 남침을 종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의 한 원인이 되었다.[5]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인조반정 | 이괄의 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이괄의 난 | 승정원일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이괄의 난 | 창경궁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이괄의 난 | 창덕궁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이괄의 난 | 남한산성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이괄 | 이괄의 난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임경업 | 이괄의 난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이원익 | 이괄의 난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장만 | 이괄의 난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한명련 | 이괄의 난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이시백 | 이괄의 난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기익헌 | 이괄의 난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이괄의 난 | 정묘호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임경업 | 정묘호란난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신영상-백마산성을 지킨 임경업장군 | 임경업 |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 A ekc:depicts B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 ↑ "이괄의 난",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 ↑ "이괄의 난",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 ↑ 하현강, "이괄의 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하현강, "이괄의 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하현강, "이괄의 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