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소성전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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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6일 (목) 02:27 판
매소성전투(買肖城戰鬪) | |
대표명칭 | 매소성전투 |
---|---|
한자표기 | 買肖城戰鬪 |
유형 | 전투 |
시대 | 삼국 |
날짜 | 675년 09월 29일 (신라 문무왕 15) |
관련인물 | 이근행,설인귀,김원술 |
관련장소 |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대전리산성 |
목차
정의
675년(문무왕 15) 나당전쟁(羅唐戰爭)중 신라가 당(唐)의 20만 대군과 매소성(買肖城)에서 싸워 크게 승리를 거둔 전투.
내용
고구려가 패망한 뒤, 고구려의 각지에서 일어난 고구려 부흥군이 크게 일어났는데, 670년 3월 신라의 설오유(薛烏儒)가 고구려 유민인 고연무(高延武)와 함께 각각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넘어 당나라 군사와 싸운 것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나당전쟁이 전개되었다.[1]
당나라는 고간(高侃)과 이근행(李謹行)에게 한병(漢兵)과 말갈병을 거느리고 평양·황해도 방면에서 북상하는 신라군을 저지하게 하였다. 670년부터 시작된 나당전쟁은 673년 무렵 임진강을 경계로 고착상태에 빠진다. 당(唐)은 675년 유인궤(劉仁軌)를 계림대총관으로 삼아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하였다.
675년 2월 당의 유인궤가 칠중성(七重城 : 파주 적성)을 함락하고, 이근행은 기병 7만을 포함한 20만 대군을 이끌고 매소성 부근에 주둔하였다.
그해 9월 설인귀의 함대가 한강 하류의 천성(泉城)을 공격하였으나 신라의 문훈(文訓)등이 이끄는 신라군이 당군을 공격하여 말 1천필을 노획할 정도로 크게 이겼다.[2] 설인귀의 보급부대가 패퇴하고 겨울로 접어들자 매소성에 주둔하던 이근행의 부대는 신라군의 공격에 말 30,380필과 많은 병기를 버리고 북쪽으로 퇴각하였다.[3]
전투에서 패한 당은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요동성으로 옮기고, 신라가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의 땅을 차지하게 되어 명실상부한 통일신라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나당전쟁 | 매소성전투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유인궤 | 매소성전투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고간 | 매소성전투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이근행 | 매소성전투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설인귀 | 매소성전투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문훈 | 매소성전투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김원술 | 매소성전투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김유신 | 김원술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675년 09월 29일 | 이근행은 매소성전투에 참가하였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8.011789 | 127.078157 | 매소성전투는 매소성에서 발발하였다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 ↑ 3월에 사찬(沙湌) 설오유(薛烏儒)가 고구려 태대형(太大兄) 고연무(高延武)와 함께 각각 정예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옥골(屋骨)에 이르렀는데, △△△ 말갈군사들이 먼저 개돈양(皆敦壤)에 이르러서 기다리고 있었다. "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문무왕 10년춘3월",
『한국사데이타베이스』, online 국사편찬위원회. - ↑ 가을 9월에 설인귀(薛仁貴)가 숙위학생(宿衛學生) 풍훈(風訓)의 아버지 김진주(金眞珠)가 본국(本國)에서 목베여 죽임을 당하였으므로, 풍훈을 길을 이끄는 사람으로 삼아 천성(泉城)을 쳐들어왔다. 우리 장군인 문훈(文訓)등이 맞서 싸워 이겼는데, 1천4백 명의 목을 베고 병선(兵船) 40척을 빼앗았으며, 설인귀가 포위를 풀고 도망가자 전마(戰馬) 1천 필도 얻었다. "삼국사기 권제7 신라본기 문무왕 15년추9월",
『한국사데이타베이스』, online 국사편찬위원회. - ↑ 을해년(문무왕 15년, 675)에 이르러 당나라 군사가 와서 매소천성(買蘇川城)을 공격하니, 원술이 이를 듣고 죽어서 지난 번의 치욕을 씻고자 하였다. 드디어 힘껏 싸워서 공을 세워 상을 받았다. "삼국사기 권제43 열전 김유신전 부록 아들 원술(元述)",
『한국사데이타베이스』, online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