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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설은 일제가 그들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해 낸 식민사관 중 하나이다.<ref>김태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7414 임나일본부설]",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일본인과 한국인은 본래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다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과 함께 표리관계를 이루면서 35년간의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는 관념적 버팀대로서 기능하였다.<ref>"[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58201 임나일본부설]",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임나일본부설은 일제가 그들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해 낸 식민사관 중 하나이다.<ref>김태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7414 임나일본부설]",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일본인과 한국인은 본래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다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과 함께 표리관계를 이루면서 35년간의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는 관념적 버팀대로서 기능하였다.<ref>"[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58201 임나일본부설]",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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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근거 중 핵심적인 것이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적힌 내용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진구황후]](神功皇后)가 보낸 왜군이 369년 한반도에 건너와 7국(國)과 4읍(邑)을 점령하였고, 그뒤 임나(任那:伽倻)에 일본부가 설치되었으며, 562년 신라에 의해 멸망하였다고 한다. 즉 일본은 369년부터 562년까지 약 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으며 그 중심기관이 가야에 두어진 [[임나일본부]]라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도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거론되었다. 비문의 신묘년(391년) 기사를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임나, 신라 등을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당시 왜국의 한반도 남부 지배를 알려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한 것이다.<br/>그러나 '임나일본부'란 명칭은 『[[일본서기]]』의 6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기록에는 빈번히 나타나지만 한국의 기록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그 존재 여부조차 의심되었고 이에 대한 반론들이 제기되었다. 제일 먼저 나온 것이 북한학계 [[김석형]](金錫亨)의 분국설(分國說)이다. 이 설에 의하면 삼한, 삼국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가 그곳에서 삼한, 삼국의 식민지라 할 수 있는 분국들을 곳곳에 설치하였고, 이때 임나일본부는 일본열도 내에 수립된 가야의 분국 임나에 설치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 설은 광개토대왕비문이 석회가 발라져 변조되었다는 주장과 함께, 그 사실 여부보다는 근대 일본역사학의 '제국주의적 체질'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 의미가 있었다.<ref>"[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58201 임나일본부설]",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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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근거 중 핵심적인 것이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적힌 내용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진구황후]](神功皇后)가 보낸 왜군이 369년 한반도에 건너와 7국(國)과 4읍(邑)을 점령하였고, 그뒤 임나(任那:伽倻)에 일본부가 설치되었으며, 562년 신라에 의해 멸망하였다고 한다. 즉 일본은 369년부터 562년까지 약 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으며 그 중심기관이 가야에 두어진 [[임나일본부]]라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도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거론되었다. 비문의 신묘년(391년) 기사를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임나, 신라 등을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당시 왜국의 한반도 남부 지배를 알려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한 것이다.<ref>"[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58201 임나일본부설]",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br/>그러나 '임나일본부'란 명칭은 『[[일본서기]]』의 6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기록에는 빈번히 나타나지만 한국의 기록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그 존재 여부조차 의심되었고 이에 대한 반론들이 제기되었다. 제일 먼저 나온 것이 북한학계 [[김석형]](金錫亨)의 분국설(分國說)이다. 이 설에 의하면 삼한, 삼국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가 그곳에서 삼한, 삼국의 식민지라 할 수 있는 분국들을 곳곳에 설치하였고, 이때 임나일본부는 일본열도 내에 수립된 가야의 분국 임나에 설치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 설은 광개토대왕비문이 석회가 발라져 변조되었다는 주장과 함께, 그 사실 여부보다는 근대 일본역사학의 '제국주의적 체질'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 의미가 있었다.<ref>"[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58201 임나일본부설]",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지식 관계망'''==
 
=='''지식 관계망'''==

2017년 11월 15일 (수) 18:00 판

임나일본부설
(任那日本府說)
대표명칭 임나일본부설
한자표기 任那日本府說
이칭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
유형 학설



정의

왜가 4세기 중엽에 가야지역을 군사적으로 정벌해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6세기 중엽까지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학설이다.[1]

내용

임나일본부설은 일제가 그들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해 낸 식민사관 중 하나이다.[2] 일본인과 한국인은 본래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다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과 함께 표리관계를 이루면서 35년간의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는 관념적 버팀대로서 기능하였다.[3]

근거 및 반박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근거 중 핵심적인 것이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적힌 내용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진구황후(神功皇后)가 보낸 왜군이 369년 한반도에 건너와 7국(國)과 4읍(邑)을 점령하였고, 그뒤 임나(任那:伽倻)에 일본부가 설치되었으며, 562년 신라에 의해 멸망하였다고 한다. 즉 일본은 369년부터 562년까지 약 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으며 그 중심기관이 가야에 두어진 임나일본부라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도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거론되었다. 비문의 신묘년(391년) 기사를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임나, 신라 등을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당시 왜국의 한반도 남부 지배를 알려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한 것이다.[4]
그러나 '임나일본부'란 명칭은 『일본서기』의 6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기록에는 빈번히 나타나지만 한국의 기록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그 존재 여부조차 의심되었고 이에 대한 반론들이 제기되었다. 제일 먼저 나온 것이 북한학계 김석형(金錫亨)의 분국설(分國說)이다. 이 설에 의하면 삼한, 삼국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가 그곳에서 삼한, 삼국의 식민지라 할 수 있는 분국들을 곳곳에 설치하였고, 이때 임나일본부는 일본열도 내에 수립된 가야의 분국 임나에 설치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 설은 광개토대왕비문이 석회가 발라져 변조되었다는 주장과 함께, 그 사실 여부보다는 근대 일본역사학의 '제국주의적 체질'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 의미가 있었다.[5]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임나일본부설 광개토대왕릉비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임나일본부설 일본서기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고구려 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릉비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광개토대왕릉비 고구려 장수왕 A는 B에 의해 건립되었다 A ekc:founder B

공간정보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1. 김태식, "임나일본부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김태식, "임나일본부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임나일본부설", 『doopedia』online, 두산백과.
  4. "임나일본부설", 『doopedia』online, 두산백과.
  5. "임나일본부설", 『doopedia』online, 두산백과.

인용 및 참조

  1. 웹 자원

유용한 정보

  1. "임나일본부설",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박문각. 온라인 참조: "임나일본부설", 시사상식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2. 박종분, 『답사여행의 길잡이 14 - 경남』, 돌베개, 2002. 온라인 참조: "임나일본부설과 가야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14 - 경남,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위도 경도 내용
41.145080 126.214245 광개토대왕릉비는 중국 지린성 지안현 퉁거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