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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21세 때 [[조선 영조|연잉군]]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로 화원 [[박동보]]가 1714년 [[조선 숙종|숙종]]의 명으로 그렸다. 화면 좌측 상단에 “처음에 연잉군으로 책봉되었고 옛 호는 양성헌이다(初封延礽君古號養性軒)”라고 쓰여 있어 [[조선 영조|영조]]가 왕이 되기 전 왕자 시절에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br/> | 이 그림은 21세 때 [[조선 영조|연잉군]]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로 화원 [[박동보]]가 1714년 [[조선 숙종|숙종]]의 명으로 그렸다. 화면 좌측 상단에 “처음에 연잉군으로 책봉되었고 옛 호는 양성헌이다(初封延礽君古號養性軒)”라고 쓰여 있어 [[조선 영조|영조]]가 왕이 되기 전 왕자 시절에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br/> | ||
− | 이 <연잉군 초상>이 그려질 당시 [[조선 숙종|숙종]]은 8개월간 병상에 있었는데 그동안 밤낮으로 곁에서 시중들었던 [[조선 영조|연잉군]]과 이복동생 연령군(延齡君)의 수고를 기특하게 여겨 화원 [[박동보]]로 하여금 두 왕자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마구간에 기르던 말과 함께 하사하였다는 내용이 『[[근역서화징]]』에 전해지고 있다.<ref>조선미, 『한국의 초상화, 形과 影의 예술』, 돌베게, 2009, 79쪽.</ref><br/> | + | 이 <연잉군 초상>이 그려질 당시 [[조선 숙종|숙종]]은 8개월간 병상에 있었는데 그동안 밤낮으로 곁에서 시중들었던 [[조선 영조|연잉군]]과 이복동생 [[연령군 이훤|연령군(延齡君)]]의 수고를 기특하게 여겨 화원 [[박동보]]로 하여금 두 왕자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마구간에 기르던 말과 함께 하사하였다는 내용이 『[[근역서화징]]』에 전해지고 있다.<ref>조선미, 『한국의 초상화, 形과 影의 예술』, 돌베게, 2009, 79쪽.</ref><br/> |
− | + | [[잠저]]였던 [[창의궁|창의궁(彰義宮)]], [[장보각|장보각(藏譜閣)]]에 모셨다가 [[경희궁|경희궁(慶熙宮)]] [[태령전|태령전(泰寧展)]]을 거쳐 1778년에 [[창덕궁|창덕궁(昌德宮)]] [[선원전|선원전(璿源展)]]으로 옮겨 봉안되었다.<ref>국립고궁박물관, 『조선 왕실의 어진과 진전』, 국립고궁박물관, 2015, 66쪽.</ref> 이후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옮겨졌다가 화재를 당하여 화폭의 1/3 가량이 소실되었다. 현재는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br/> | |
<연잉군 초상>은 <효령대군 초상>, 신원미상의 <대군 초상>과 함께 몇 점 남아있지 않은 조선시대 왕자의 초상으로 매우 희귀한 예이다. 또한 이모본이 아닌 당대에 그려진 작품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 <연잉군 초상>은 <효령대군 초상>, 신원미상의 <대군 초상>과 함께 몇 점 남아있지 않은 조선시대 왕자의 초상으로 매우 희귀한 예이다. 또한 이모본이 아닌 당대에 그려진 작품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 ||
2017년 10월 28일 (토) 01:48 판
연잉군 초상 | |
한자명칭 | 延礽君 肖像 |
---|---|
작가 | 박동보 |
제작시기 | 1714년 |
소장처 | 국립고궁박물관 |
문화재지정사항 | 보물 제1491호 |
유형 | 표준영정 |
크기(세로×가로) | 183×87㎝ |
목차
정의
조선시대 임금인 영조(재위 1724∼1776)의 왕자 시절 모습을 그린 초상.
내용
초상의 제작 및 보관
이 그림은 21세 때 연잉군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로 화원 박동보가 1714년 숙종의 명으로 그렸다. 화면 좌측 상단에 “처음에 연잉군으로 책봉되었고 옛 호는 양성헌이다(初封延礽君古號養性軒)”라고 쓰여 있어 영조가 왕이 되기 전 왕자 시절에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연잉군 초상>이 그려질 당시 숙종은 8개월간 병상에 있었는데 그동안 밤낮으로 곁에서 시중들었던 연잉군과 이복동생 연령군(延齡君)의 수고를 기특하게 여겨 화원 박동보로 하여금 두 왕자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마구간에 기르던 말과 함께 하사하였다는 내용이 『근역서화징』에 전해지고 있다.[1]
잠저였던 창의궁(彰義宮), 장보각(藏譜閣)에 모셨다가 경희궁(慶熙宮) 태령전(泰寧展)을 거쳐 1778년에 창덕궁(昌德宮) 선원전(璿源展)으로 옮겨 봉안되었다.[2] 이후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옮겨졌다가 화재를 당하여 화폭의 1/3 가량이 소실되었다. 현재는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연잉군 초상>은 <효령대군 초상>, 신원미상의 <대군 초상>과 함께 몇 점 남아있지 않은 조선시대 왕자의 초상으로 매우 희귀한 예이다. 또한 이모본이 아닌 당대에 그려진 작품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표준영정에 묘사된 모습
<영조 표준영정>은 오사모에 단령을 입고 공수자세를 한 채로 호피를 깐 의자에 앉아있는 좌안칠분면의 전신교의좌상이다. 의복은 녹포단령에 군, 왕자를 나타내는 금색의 백택白澤흉배, 청홍색 서대를 두르고 있다. 신발은 검은색 녹피화를 신고 있다. 단령의 운문이 세밀하게 묘사되었다. 안면의 묘사는 갈색선으로 이목구비의 윤곽을 잡고 선염으로 입체감을 표현하였다. 숱이 적고 성근 수염, 치켜 올라간 눈매, 매우 날렵하고 오똑한 콧날을 한 모습으로 이러한 용모는 노년의 모습을 그린 <영조 어진>에도 거의 동일하게 나타나도 있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영조 어진 | 어진 | A는 B에 해당한다 | A dcterms:type B |
영조 어진 | 조선 영조 | A는 B를 묘사하였다 | A ekc:depicts B |
영조 어진 | 조석진 | A는 B가 그렸다 | A dcterms:creator B |
영조 어진 | 채용신 | A는 B가 그렸다 | A dcterms:creator B |
영조 어진 | 국립고궁박물관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영조 어진 | 좌안칠분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익선관 | 영조 어진 | A는 B에 나타난다 | A ekc:isShownOn B |
곤룡포 | 영조 어진 | A는 B에 나타난다 | A ekc:isShownOn B |
보 | 영조 어진 | A는 B에 나타난다 | A ekc:isShownOn B |
각대 | 영조 어진 | A는 B에 나타난다 | A ekc:isShownOn B |
포 | 영조 어진 | A는 B에 나타난다 | A ekc:isShownOn B |
영조 어진 | 연잉군 초상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연잉군 초상 | 조선 영조 | A는 B를 묘사하였다 | A ekc:depicts B |
연잉군 초상 | 국립고궁박물관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987년 12월 26일 | 영조 어진이 보물 제932호로 지정되었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7.5765660 | 126.9748840 | 영조 어진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시각자료
주석
참고문헌
유용한 정보
- 조선미, "영조어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더 읽을거리
- 전시도록
- 국립중앙박물관, 『초상화의 비밀』, 국립중앙박물관, 2011.
- 단행본
- 문화재청, 『한국의 초상화 : 역사속의 인물과 조우하다』, 눌와, 2007.
- 조선미, 『왕의 얼굴』, 사회평론, 2012
- 논문
- 정석범, 『蔡龍臣 회화의 연구』,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