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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27일 (금) 20:29 판
문익점(文益漸) | |
대표명칭 | 문익점 |
---|---|
한자표기 | 文益漸 |
생몰년 | 1329-1399 |
본관 | 남평(南平) |
이칭 | 문익첨(文益瞻) |
시호 | 충선공(忠宣公) |
호 | 삼우당(三憂堂) |
자 | 일신(日新) |
출생지 | 경상남도 산청 |
시대 | 고려 |
부 | 문숙선(文淑宣) |
목차
정의
문익점(文益漸, 1329-1399)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자 관료이다. 그는 중국에서 목화씨를 들여와 국내에서 최초로 재배에 성공한 것으로 유명하다. [1]
내용
덕흥군 옹립사건과 문익점
기철이 공민왕에게 처형을 당하자, 기황후와 최유가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덕흥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하였다. 고려 조정은 공민왕 폐위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적극적인 외교를 펼쳤다. 이공수와 허강, 문익점 등이 함께 원나라에 파견되어 진정표를 올렸다. 이 사건은 고려에서 덕흥군의 군대를 물리치며 끝이 났고, 원에서는 공민왕의 복위조서를 내렸다. 이로써 문익점과 이공수를 비롯한 사신들도 고려로 돌아온다. [2]
목화의 전래
『삼우당실기』에서는 문익점이 덕흥군 편에 가담하기를 거부하다가 운남(雲南) 일대로 귀양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중국 강남(江南) 지역에서 목화씨를 얻어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사절요』에는 문익점이 원나라의 회유에 덕흥군이 주는 관직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당시 운남은 한족 군웅들이 점거하고 있어 여행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기에 화북지역에서 지내면서 목화씨를 구했을 가능성이 높다.[3] 『태조실록』에 따르면 문익점은 1364년 장인 장천익과 함께 고향 진주로 내려가 목화 재배를 시도한다. 문익점의 목화 재배 성공으로 솜과 무명이 널리 사용되며 백성의 의생활이 크게 향상되었다. [4]
문익점과 이천우
문익점은 이성계의 이복형인 이원계를 사위로 두었다. 이원계의 아들인 이천우는 문익점의 외손자가 된다. 이원계는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자 절명시를 남기고 죽고, 문익점도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에 대한 충의로 은거하였다. 그러나 그의 외손자 이천우는 이성계 일파를 도와 조선의 개국공신이 된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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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 ↑ 정동훈, "문익점",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정동훈, "문익점",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정동훈, "문익점",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정동훈, "문익점",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이옥희 , 「문익점 목면 전래에 관한 문헌자료와 구비자료의 담론 양상과 의미」, 『남도민속연구』32, , 남도민속학회, 2016.
- 薛錫圭, 「三憂堂 文益漸의 學問傾向과 士林의 追崇運動」, 『안동사학』32, , 안동사학회, 2005.
- 단행본
- 국립민속박물관, 『학회지』, 國立民俗博物館, 1991.
- 웹자원
유용한 정보
- "문익점은 붓두껍에 목화씨를 몰래 감춰 왔다?", 『채널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