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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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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법유학===
 
===구법유학===
 
661년(문무왕 1)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중국으로 들어갔다.<ref>민백</ref>
 
661년(문무왕 1)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중국으로 들어갔다.<ref>민백</ref>
의상은 양주에 도착해 유지인의 청으로 관아에 머물게 되었다. 마침내 의상은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을 찾아뵈었다. 지엄은 마니보주(摩尼寶珠)를 보는 꿈을 꾸고 의상을 맞이하노라고 했다. 비로소 의상은 화엄(華嚴)의 깊은 뜻을 해석하게 되었다.<ref> [네이버 지식백과] 의상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 편), 국립민속박물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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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은 양주에 도착해 유지인의 청으로 관아에 머물게 되었다. 마침내 의상은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을 찾아뵈었다. 지엄은 마니보주(摩尼寶珠)를 보는 꿈을 꾸고 의상을 맞이하노라고 했다. 비로소 의상은 화엄(華嚴)의 깊은 뜻을 해석하게 되었다.<ref>국립민속박물관,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120812&cid=50223&categoryId=51051 의상]", 한국민속문학사전: 설화 편, 한국민속대백과사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중국화엄종의 제2조로서 화엄학의 기초를 다진 지엄으로부터 8년 동안 화엄을 공부하였는데, 그의 나이 38세로부터 44세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때, 남산율종(南山律宗)의 개조(開祖) 도선율사(道宣律師)와 교유하였으며, 중국화엄종의 제3조 현수(賢首)와의 교유는 귀국한 뒤까지 이어졌다.<ref>민백</ref>
 
중국화엄종의 제2조로서 화엄학의 기초를 다진 지엄으로부터 8년 동안 화엄을 공부하였는데, 그의 나이 38세로부터 44세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때, 남산율종(南山律宗)의 개조(開祖) 도선율사(道宣律師)와 교유하였으며, 중국화엄종의 제3조 현수(賢首)와의 교유는 귀국한 뒤까지 이어졌다.<ref>민백</ref>

2017년 10월 7일 (토) 14:28 판

의상(義湘)
BHST Monk1.png
대표명칭 의상
한자 義湘
생몰년 625년-702년
시호 해동화엄시조 원교국사(海東華嚴始祖圓敎國師)
이칭 義相, 義想
성씨 김씨(金氏)


정의

신라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의상의 속성은 김씨(金氏)이고 아버지는 한신(韓信)으로, 경주의 진골귀족 출신이다. [1] 중국의 『송고승전(宋高僧傳)』에는 박씨(朴氏)로 나와 있으나 한국의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을 참고하면 김씨(金氏)라는 설이 유력하다.[2]

출가수행

644년 19세 때 경주 황복사(皇福寺)로 출가해 승려가 되었다. [3]

한동안 8년 연상의 원효(元曉, 617~686)와 함께 공부한 시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둘은 함께 중국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북송의 찬녕(贊寧, 919~1001)이 지은 『송고승전(宋高僧傳)』 당신라국(唐新羅國) 의상전(義湘傳)에는 원효와 함께 대당유학길에 올랐던 의상의 전기 등이 자세히 전하고 있다.[4]

650년 원효(元曉)와 함께 현장(玄奘)이 인도에서 새로 들여온 신유식(新唯識)을 배우기 위해 중국의 당(唐) 나라로 유학을 떠나려 했으나 요동(遼東)에서 첩자(諜者)로 몰려 사로잡히면서 실패하고 신라로 되돌아왔다.[5]

구법유학

661년(문무왕 1)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중국으로 들어갔다.[6] 의상은 양주에 도착해 유지인의 청으로 관아에 머물게 되었다. 마침내 의상은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을 찾아뵈었다. 지엄은 마니보주(摩尼寶珠)를 보는 꿈을 꾸고 의상을 맞이하노라고 했다. 비로소 의상은 화엄(華嚴)의 깊은 뜻을 해석하게 되었다.[7]

중국화엄종의 제2조로서 화엄학의 기초를 다진 지엄으로부터 8년 동안 화엄을 공부하였는데, 그의 나이 38세로부터 44세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때, 남산율종(南山律宗)의 개조(開祖) 도선율사(道宣律師)와 교유하였으며, 중국화엄종의 제3조 현수(賢首)와의 교유는 귀국한 뒤까지 이어졌다.[8]

귀국 및 활동

의상은 671년(문무왕 11년)에 신라로 돌아왔는데,[9]『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의상의 귀국 동기는 당나라 고종(高宗)의 신라 침략소식을 본국에 알리는 데 있었다고 하며, 『송고승전』에는 화엄대교(華嚴大敎)를 펴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였다.[10] 귀국한 뒤에 동해의 굴에서 관음보살(觀音菩薩)를 친견(親見)하고 낙산사(洛山寺)를 창건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데[11], 당시의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은 그의 관음신앙을 알게 해주는 261자의 간결한 명문이다.[12]

그 뒤 676년(문무왕 16)부석사(浮石寺)를 세우기까지 화엄사상을 펼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서 전국을 편력하였다. 그가 건립한 사찰은 부석사를 비롯하여 중악팔공산 미리사(美里寺), 남악지리산 화엄사(華嚴寺), 강주가야산 해인사(海印寺), 웅주 가야현보원사(普願寺), 계룡산 갑사(甲寺), 삭주화산사(華山寺), 금정산 범어사(梵魚寺), 비슬산 옥천사(玉泉寺), 전주모악산 국신사(國神寺) 등 화엄십찰(華嚴十刹)이다. 이밖에도 불영사(佛影寺), 삼막사(三幕寺), 초암사(草庵寺), 홍련암(紅蓮庵) 등을 창건한 것으로 전한다.

그에게는 3,000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오진(悟眞), 지통(智通), 표훈(表訓), 진정(眞定), 진장(眞藏), 도융(道融), 양원(良圓), 상원(相源), 능인(能仁), 의적(義寂) 등 10명이 아성(亞聖)으로 불렸으며, 범체(梵體)나 도신(道身) 등도 뛰어난 제자들이다.

저술로는 『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 1권, 『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鈔記)』 1권, 『소아미타의기(小阿彌陀義記)』 1권, 『화엄일승법계도』 1권, 『백화도량발원문』 1권 및 최근 발견된 『일승발원문(一乘發願文)』 등이 있다.

입적

의상은 702년(효소왕 11년)에 78세의 나이로 입적(入寂)하였으며, 고려 숙종에게 ‘해동화엄시조 원교국사(海東華嚴始祖圓敎國師)’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13]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각주

  1. "진지한 수행자, 우리나라 화엄종의 개조 의상", 한국의 위대한 인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2. 정수일, 『실크로드 사전』, 창비, 2013. 온라인 참조: "의상", 실크로드 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3. 민백
  4. "진지한 수행자, 우리나라 화엄종의 개조 의상", 한국의 위대한 인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5. "의상",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6. 민백
  7. 국립민속박물관, "의상", 한국민속문학사전: 설화 편, 한국민속대백과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8. 민백
  9. "의상",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10. 민백
  11. "의상",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12. 민백
  13. "의상",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참고문헌

  • "의상",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진지한 수행자, 우리나라 화엄종의 개조 의상", 한국의 위대한 인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정수일, 『실크로드 사전』, 창비, 2013. 온라인 참조: "의상", 실크로드 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국립민속박물관, "의상", 한국민속문학사전: 설화 편, 한국민속대백과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