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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5일 (목) 23:47 판
오광운(吳光運) | |
대표명칭 | 오광운 |
---|---|
한자표기 | 吳光運 |
생몰년 | 1689년-1745년 |
본관 | 동복(同福) |
시호 | 충장(忠章) |
호 | 약산(藥山) |
자 | 영백(永伯) |
시대 | 조선 |
대표저서 | 『약산만고』 |
대표직함 | 개성부 유수, 예조참판, 부사과, 대가산, 대사헌 |
배우자 | 권경의 딸 권씨 |
부 | 돈녕부도정 오상순 |
모 | 안후열의 딸 광주 안씨 |
자녀 | 병조좌랑 오대관, 오대성 |
성격 | 인물 |
유형 | 백관 |
목차
정의
조선 후기의 백관 중 문관으로 청남의 지도자이다. 대사례의궤 편찬을 담당하였다.
내용
관직
1714년(숙종 40) 사마시에 급제하였고, 1719년(숙종 45)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설서에 올라 연잉군의 서연관이 되었으며 승지를 지냈다. 1728년(영조 4) 홍문관 수찬, 교리 및 동부승지를 역임하였다. 3월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대비할 것을 주장하였다. 영조의 탕평책을 지지하여 당인 가운데 뛰어난 인물들을 고루 등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1737년(영조 13) 대사간을 거쳐 1740년(영조 16) 부사과가 되었다. 이 때 소론인 원경하 등과 함께 다시 대탕평론을 주장하였다. 1743년(영조 19) 예조참판을 역임하였고, 다음해 사직을 거쳐 개성부 유수가 되었다.
학문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났고 『반계수록(磻溪隨錄)』의 서문을 썼다. 저서로 『약산만고』가 있다. 이 책에는 탕평론과 이인좌의 난, 화폐의 유통문제, 역사평론 등의 내용이 있다.
사후
이조판서와 대제학에 추증되어 1788년(정조 12) ‘충장(忠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오광운 | 대사례의궤 | A는 B를 담당하였다 | |
오상순 | 오광운 | A는 B의 아버지이다 | |
안후열 | 오광운 | A는 B의 외조부이다 | |
광주 안씨 | 오광운 | A는 B의 어머니이다 | |
권경 | 오광운 | A는 B의 장인이다 | |
권씨 | 오광운 | A는 B의 아내이다 | |
오대관 | 오광운 | A는 B의 장남이다 | |
오대성 | 오광운 | A는 B의 차남이다 | |
오광운 | 약산만고 | A는 B를 저술하였다 |
시간정보
공간정보
시각자료
갤러리
『약산만고』 오광운의 필체, 국립중앙도서관 소장.[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