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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윤선도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대표 저서는 『고산유고』이다. | 고산 윤선도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대표 저서는 『고산유고』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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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생 및 가족관계 | ||
+ | 고산 윤선도는 1587년(선조 20) 한성 동부의 연화방(蓮花坊 지금의 종로구 연지동)에서 태어나 8세에 관찰공 유기(惟幾)의 양자가 되어 [[해남 윤씨]]의 종손으로 입적되었다. 윤선도는 윤돈의 딸 남원 윤씨와 결혼하여 윤인미를 낳았는데, 윤인미의 아들 윤이석의 양자가 바로 [[윤두서]]이다.<ref>전상욱"[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62 윤선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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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직한 성품 | ||
+ | 윤선도는 그가 남긴 가훈에서도 알 수 있듯 선을 쌓고 공정한 태도를중요시 여겼는데 이는 그의 관직활동에서도 잘 드러난다. 윤선도는 30세인 1616년, 당시 전횡을 일삼던 권신 이이첨을 탄핵하는 병진소를 올렸고 1694년에는 논원두표소를 올려 효종이 구상한 정국의 주요 인물이었던 원두표를 탄핵하기도 했다. 이는 그의 강직한 성품을 잘 드러내는 일면이기는 하지만 윤선도가 관직생활 중 끊임없이 유배와 복위를 반복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특히 병진소에서 [[김제남 역모 사건]]을 언급하여 서인들을 정적으로 돌려 이후 유배와 복위를 반복하도록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ref>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http://db.itkc.or.kr/dir/pop/heje?dataId=ITKC_BT_0332A 헤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문집총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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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직활동=== | ||
+ | *각종 사화/윤의중, 정개청옥사 | ||
+ | [[해남 윤씨]]는 호남에서 몇 안되는 동인(東人) 가문이었는데 당시 [[정개청 옥사 | 정개청(鄭介淸) 옥사]]로 인해 그의 조부인 [[윤의중 | 윤의중(尹毅中)]]이 휘말리게 되었고 이후 동인이 남인과 서인으로 갈라지게 되었다.<ref>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http://db.itkc.or.kr/dir/pop/heje?dataId=ITKC_BT_0332A 헤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문집총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ref> | ||
+ | 1658년 윤선도는 국시소를 올려 정개청(鄭介淸)의 신원을 청하였고 이 일로 [[남구만]]이 윤선도에게 탄핵을 건의했으며 [[송시열 |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 | 송준길(宋浚吉)]] 등의 노론과 대립하게 되었다. | ||
+ | *예송논쟁 | ||
+ | 1659년에 효종이 승하하자 이듬해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 문제로 남인의 삼년설과 서인의 기년설(朞年說)이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고산은 남인으로서 삼년설을 주장하는 장문의 소를 올려 기년설을 주장한 [[송시열 | 송시열(宋時烈]]을 배척한다. 이 때 박세채 가 「복제사의」를 지어 윤선도와 윤후 등의 3년복설을 비판하기도 했다. 이 논쟁에서 패한 그는 함경도 삼수(三水)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후 광양(光陽)으로 이배되는 등 약 8년간의 유배 생활을 겪는다<ref>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http://db.itkc.or.kr/dir/pop/heje?dataId=ITKC_BT_0332A 헤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문집총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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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술 활동=== | ||
+ | 윤선도는 보길도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문학작품을 남겼다. 이 때 지어진 대표적인 작품이 「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이다. 「어부사시사」는 40수의 단가로, 작자와 창작연대를 알수 없는 고려후기 「어부가」를 재창작한 작품이다. 문집으로는 [[고산유고 | 『 고산선생유고(孤山先生遺稿)』]]가 있다. 이 책은 [[서유린]]이 [[조선 정조 | 정조]]의 명을 받고 간행한 것으로, 한시문이 실려 있고, 별집에는 한시문과 시조(35편), 「어부사시사」가 실려 있다. . 윤선도는 [[강호문학]]의 대가로 [[정철]], [[박인로]]와 함께 조선시대 3대 가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ref>전상욱"[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62 윤선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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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길도 입향=== | ||
+ | 윤선도는 [[병자호란 | 호란]]이 발발한 후 가솔들을 이끌고 강화도로 올라가다가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제주도로 배를 돌린다. 이 일로 인해 윤선도는 '남한산성에서 왕을 알현하지 않고 돌아갔다(不奔問)'는 죄목으로 1638년 영덕으로 유배를 가는 등 서인들에게 지속적으로 그를 견제할 수 있는 명분을 주게 된다. 그러나 이 떄 제주도로 향하던 도중 잠시 들렸던 [[보길도]]에 매료되어 보길도로의 입향 및 은거를 결심하게 되었고, 이는 그의 삶의 전환정이 되었다. <ref>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http://db.itkc.or.kr/dir/pop/heje?dataId=ITKC_BT_0332A 헤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문집총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ref> | ||
+ | 1667년(현종8) 8월 해남으로 돌아온 윤선도는 해남으로 내려오면서 수원의 집 일부를 뜯어 옮겨왔다. 이 집은 효종이 즉위 후 사부였던 윤선도를 위해 지어준 집으로 현재 녹우당 사랑채이다. 지금은 해남윤씨 종가 전체를 통틀어 [[해남윤씨 녹우당 | 녹우당]]이라고 부르지만 원래는 그 사랑채 이름이 녹우당이었다. 녹우당 근처에는 [[낙서재]]를 지어 그곳에 머물며 창작 활동에 전념하였다. <ref>"[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12&cp_code=cp0422&index_id=cp04220098&content_id=cp042200980001&search_left_menu= 해남 윤씨 윤선도 묘와 고택 녹우당]",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콘텐츠닷컴』<sup>online</sup></online></html>, 한국콘텐츠진흥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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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의 문학 활동=== | ===고산의 문학 활동=== | ||
윤선도는 보길도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문학작품을 남겼다. 이 때 지어진 대표적인 작품이 「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이다. 「어부사시사」는 40수의 단가로, 작자와 창작연대를 알수 없는 고려후기 「어부가」를 재창작한 작품이다. 이외 윤선도는 이 시기에 「 산중신곡(山中新曲)」·「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고금영(古今詠)」·「증반금(贈伴琴)」 등을 지었다. 이후 효종대 예조참의에 임명되었다가, 서인의 모략으로 사직한 윤선도는 경기도 양주(楊州)의 고산에서 생활하였다. 이 곳에서 윤선도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인 「 몽천요(夢天謠)」를 지었다. 문집으로는 [[고산유고 | 『 고산선생유고(孤山先生遺稿)』]]가 있다. 이 책은 [[서유린]]이 [[조선 정조 | 정조]]의 명을 받고 간행한 것으로, 한시문이 실려 있고, 별집에는 한시문과 시조(35편), 「어부사시사」가 실려 있다. 이 밖에 친필로 된 가첩으로 『금쇄동집고(金鎖洞集古)』 와 『산중신곡』이 전한다. 윤선도는 [[정철]]. [[박인로]]와 함께 조선시대 3대 가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ref>전상욱"[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62 윤선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윤선도는 보길도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문학작품을 남겼다. 이 때 지어진 대표적인 작품이 「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이다. 「어부사시사」는 40수의 단가로, 작자와 창작연대를 알수 없는 고려후기 「어부가」를 재창작한 작품이다. 이외 윤선도는 이 시기에 「 산중신곡(山中新曲)」·「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고금영(古今詠)」·「증반금(贈伴琴)」 등을 지었다. 이후 효종대 예조참의에 임명되었다가, 서인의 모략으로 사직한 윤선도는 경기도 양주(楊州)의 고산에서 생활하였다. 이 곳에서 윤선도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인 「 몽천요(夢天謠)」를 지었다. 문집으로는 [[고산유고 | 『 고산선생유고(孤山先生遺稿)』]]가 있다. 이 책은 [[서유린]]이 [[조선 정조 | 정조]]의 명을 받고 간행한 것으로, 한시문이 실려 있고, 별집에는 한시문과 시조(35편), 「어부사시사」가 실려 있다. 이 밖에 친필로 된 가첩으로 『금쇄동집고(金鎖洞集古)』 와 『산중신곡』이 전한다. 윤선도는 [[정철]]. [[박인로]]와 함께 조선시대 3대 가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ref>전상욱"[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62 윤선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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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관계망== | ==지식 관계망== |
2017년 10월 5일 (목) 18:58 판
윤선도(尹善道) | |
대표명칭 | 윤선도 |
---|---|
한자표기 | 尹善道 |
생몰년 | 1587-1671 |
본관 | 해남(海南) |
호 | 산(孤山), 해옹(海翁) |
자 | 약이(約而) |
출생지 | 한성 동부의 연화방(蓮花坊) |
시대 | 조선 |
국적 | 조선 |
대표저서 | 고산유고 |
대표직함 | 동부승지 |
부 | 윤유심(尹唯深) |
정의
고산 윤선도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대표 저서는 『고산유고』이다.
생애
- 출생 및 가족관계
고산 윤선도는 1587년(선조 20) 한성 동부의 연화방(蓮花坊 지금의 종로구 연지동)에서 태어나 8세에 관찰공 유기(惟幾)의 양자가 되어 해남 윤씨의 종손으로 입적되었다. 윤선도는 윤돈의 딸 남원 윤씨와 결혼하여 윤인미를 낳았는데, 윤인미의 아들 윤이석의 양자가 바로 윤두서이다.[1]
- 강직한 성품
윤선도는 그가 남긴 가훈에서도 알 수 있듯 선을 쌓고 공정한 태도를중요시 여겼는데 이는 그의 관직활동에서도 잘 드러난다. 윤선도는 30세인 1616년, 당시 전횡을 일삼던 권신 이이첨을 탄핵하는 병진소를 올렸고 1694년에는 논원두표소를 올려 효종이 구상한 정국의 주요 인물이었던 원두표를 탄핵하기도 했다. 이는 그의 강직한 성품을 잘 드러내는 일면이기는 하지만 윤선도가 관직생활 중 끊임없이 유배와 복위를 반복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특히 병진소에서 김제남 역모 사건을 언급하여 서인들을 정적으로 돌려 이후 유배와 복위를 반복하도록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2]
관직활동
- 각종 사화/윤의중, 정개청옥사
해남 윤씨는 호남에서 몇 안되는 동인(東人) 가문이었는데 당시 정개청(鄭介淸) 옥사로 인해 그의 조부인 윤의중(尹毅中)이 휘말리게 되었고 이후 동인이 남인과 서인으로 갈라지게 되었다.[3] 1658년 윤선도는 국시소를 올려 정개청(鄭介淸)의 신원을 청하였고 이 일로 남구만이 윤선도에게 탄핵을 건의했으며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 등의 노론과 대립하게 되었다.
- 예송논쟁
1659년에 효종이 승하하자 이듬해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 문제로 남인의 삼년설과 서인의 기년설(朞年說)이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고산은 남인으로서 삼년설을 주장하는 장문의 소를 올려 기년설을 주장한 송시열(宋時烈을 배척한다. 이 때 박세채 가 「복제사의」를 지어 윤선도와 윤후 등의 3년복설을 비판하기도 했다. 이 논쟁에서 패한 그는 함경도 삼수(三水)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후 광양(光陽)으로 이배되는 등 약 8년간의 유배 생활을 겪는다[4]
저술 활동
윤선도는 보길도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문학작품을 남겼다. 이 때 지어진 대표적인 작품이 「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이다. 「어부사시사」는 40수의 단가로, 작자와 창작연대를 알수 없는 고려후기 「어부가」를 재창작한 작품이다. 문집으로는 『 고산선생유고(孤山先生遺稿)』가 있다. 이 책은 서유린이 정조의 명을 받고 간행한 것으로, 한시문이 실려 있고, 별집에는 한시문과 시조(35편), 「어부사시사」가 실려 있다. . 윤선도는 강호문학의 대가로 정철, 박인로와 함께 조선시대 3대 가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5]
보길도 입향
윤선도는 호란이 발발한 후 가솔들을 이끌고 강화도로 올라가다가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제주도로 배를 돌린다. 이 일로 인해 윤선도는 '남한산성에서 왕을 알현하지 않고 돌아갔다(不奔問)'는 죄목으로 1638년 영덕으로 유배를 가는 등 서인들에게 지속적으로 그를 견제할 수 있는 명분을 주게 된다. 그러나 이 떄 제주도로 향하던 도중 잠시 들렸던 보길도에 매료되어 보길도로의 입향 및 은거를 결심하게 되었고, 이는 그의 삶의 전환정이 되었다. [6] 1667년(현종8) 8월 해남으로 돌아온 윤선도는 해남으로 내려오면서 수원의 집 일부를 뜯어 옮겨왔다. 이 집은 효종이 즉위 후 사부였던 윤선도를 위해 지어준 집으로 현재 녹우당 사랑채이다. 지금은 해남윤씨 종가 전체를 통틀어 녹우당이라고 부르지만 원래는 그 사랑채 이름이 녹우당이었다. 녹우당 근처에는 낙서재를 지어 그곳에 머물며 창작 활동에 전념하였다. [7]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윤유기 | 윤선도 | A는 양자 B를 두었다 | |
윤의중 | 윤유기 | A는 B의 어버이이다 | |
윤의중 | 정계청 옥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병진소 | 윤선도 | A는 B에 의해 지어졌다 | |
병진소 | 이이첨 | A는 B를 언급하였다 | |
병진소 | 인조반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병진소 | 김재남 역모 사건 | A는 B를 언급하였다 | |
윤선도 | 장유 | A는 B와 교유하였다 | |
윤선도 | 봉림대군 | A는 B의 스승이다 | |
윤선도 | 인평대군 | A는 B의 스승이다 | |
윤선도 | 삼전도의 굴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삼전도의 굴욕 | 병자호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윤선도 | 보길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논원두표소 | 윤선도 | A는 B에 의해 지어졌다 | |
논원두표소 | 원두표 | A는 B를 언급하였다 | |
윤선도 | 예송논쟁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윤선도 | 고산유고 | A는 B를 저술하였다 |
시간정보
시간 | 내용 |
---|---|
1616년 | 병진소를 지어 이이첨을 탄핵하였다 |
1628년 | 봉림대군, 인평대군의 사부가 되었다 |
1638년 | 보길도로의 입향을 결심하였다. |
1649년 | 논원두표소를 지어 원두표를 탄핵하였다 |
1659년 | 예송논쟁으로 송시열과 대립하였다 |
1667년 | 관직에서 물러나 해남으로 돌아왔다 |
1671년 | 85세로 별세하였다 |
주석
- ↑ 전상욱"윤선도",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헤제",
『한국문집총간』online , 한국고전번역원. - ↑ 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헤제",
『한국문집총간』online , 한국고전번역원. - ↑ 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헤제",
『한국문집총간』online , 한국고전번역원. - ↑ 전상욱"윤선도",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헤제",
『한국문집총간』online , 한국고전번역원. - ↑ "해남 윤씨 윤선도 묘와 고택 녹우당",
『문화콘텐츠닷컴』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고미숙, 「미리 보는 <한겨레 고전 인물 평전 100> : 윤선도 평전; 고산 윤선도_정치와 미학은 어떻게 조우하는가?」, 『연보와 평전』 vol.2, 부산대학교 점필자연구소, 2009
- 문영오, 「고산 윤선도의 한시 연구」, 『한국문학연구』vol.5,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 1982
- 단행본
- 고미숙, 』윤선도 평전 : 정쟁의 격랑 속에서 강호미학을 꽃피운 조선의 풍류객』, 한겨례, 2013
- 정명래, 『어부사시사 : 낚시꾼이 풀어쓴 孤山 尹善道』, 샘물,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