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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정씨와 우복가문===
 
===진주정씨와 우복가문===
우복종택은 조선 영조가 우복 정경세(1563~1633)선생의 덕을 기려 하사한 땅에 5세손 정주원이 1750년대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는 가옥이다. 진주정씨는 강씨, 하씨와 더불어 [[진양 3성(晉陽3姓)]]의 하나로 불린 진주의 토반, 거족이었다. 이들은 골시대 이래로 진주의 토착세력으로서 강력한 재지적 기반을 구축하는 과거와 관직을 통해 문호를 신장시켜 왔으며 강씨, 하씨 등 진주일대 대성들과의 혼맥을 바탕으로 사회적 기반을 확충해 나갔다. <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尙州 晉州鄭氏 愚伏宗宅 山水軒 所藏 典籍類의 내용과 성격」,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268-9쪽.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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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복종택은 [[조선 영조 | 영조]]가 [[정경세 | 우복 정경세(1563~1633)]]의 덕을 기려 하사한 땅에 5세손 정주원이 1750년대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는 가옥이다. 진주정씨는 강씨, 하씨와 더불어 [[진양 3성(晉陽3姓)]]의 하나로 불린 진주의 토반, 거족이었다. 이들은 골시대 이래로 진주의 토착세력으로서 강력한 재지적 기반을 구축하는 과거와 관직을 통해 문호를 신장시켜 왔으며 강씨, 하씨 등 진주일대 대성들과의 혼맥을 바탕으로 사회적 기반을 확충해 나갔다. <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尙州 晉州鄭氏 愚伏宗宅 山水軒 所藏 典籍類의 내용과 성격」,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268-9쪽. </ref>
 
<!--===우복종가의 상주 입향===
 
<!--===우복종가의 상주 입향===
 
우복가문이 진주의 세거지를 떠나 상주로 정착하게 된 것은 우복의 8대조 [[정의생(鄭義生)]] 때로서 시기적으로는 대략 1300년대 중반 경에 해당한다. 『晋州鄭氏族譜』와 『商山志』 등에 따르면 정의생은 상주목사로 부임한 아버지 정택(鄭擇)을 배행하는 과정에서 당시 상주의 강력한 토착세력이던 商山金氏 김덕제(金德齊)의 딸과 혼인하게 되엇고 남부녀자혼의 관행에 따라 상주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진주정씨 일문이 형성될 수 있었고 그 직접적인 계기는 정택의 사환에 따른 정의생의 혼맥이었다. 상주 진주정씨의 보첩류에서는 정택을 1世, 정의생을 2世로 기록하여 상주입향의 의미를 크게 부각시킨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이후 정의생과 그의 자손들은 한동안 고관이나 석학을 배출하지는 못했지만 정의생과 아들 장효옹은 부사, 손자 정걸은 호군, 중손 정극공은 창신교위를 지내는 등 비록 중하급의 관직이나마 사환이 지속되었다. 이는 진주정씨가 처향에 입향한 이후 사회적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음에 분명하다.  
 
우복가문이 진주의 세거지를 떠나 상주로 정착하게 된 것은 우복의 8대조 [[정의생(鄭義生)]] 때로서 시기적으로는 대략 1300년대 중반 경에 해당한다. 『晋州鄭氏族譜』와 『商山志』 등에 따르면 정의생은 상주목사로 부임한 아버지 정택(鄭擇)을 배행하는 과정에서 당시 상주의 강력한 토착세력이던 商山金氏 김덕제(金德齊)의 딸과 혼인하게 되엇고 남부녀자혼의 관행에 따라 상주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진주정씨 일문이 형성될 수 있었고 그 직접적인 계기는 정택의 사환에 따른 정의생의 혼맥이었다. 상주 진주정씨의 보첩류에서는 정택을 1世, 정의생을 2世로 기록하여 상주입향의 의미를 크게 부각시킨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이후 정의생과 그의 자손들은 한동안 고관이나 석학을 배출하지는 못했지만 정의생과 아들 장효옹은 부사, 손자 정걸은 호군, 중손 정극공은 창신교위를 지내는 등 비록 중하급의 관직이나마 사환이 지속되었다. 이는 진주정씨가 처향에 입향한 이후 사회적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음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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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복 종택 소장 고서와 고문서===
 
===우복 종택 소장 고서와 고문서===
정재봉은 선대의 문적을 유지, 보존하는 데 성혈을 다하는 한편 한국학 연구를 촉진하는 차원에서 일체의 가문 소장 전적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대여하였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尙州 晉州鄭氏 愚伏宗宅 山水軒 所藏 典籍類의 내용과 성격」,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287쪽.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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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세의 후손인 정재봉은 선대의 문적을 유지, 보존하는 데 성혈을 다하는 한편 한국학 연구를 촉진하는 차원에서 일체의 가문 소장 전적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대여하였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尙州 晉州鄭氏 愚伏宗宅 山水軒 所藏 典籍類의 내용과 성격」,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287쪽. </ref> 이 중 한글문서인 [[연행만록]]이 2016년 장서각에서 진행한 한글특별전에 전시되었다.
 
종택에서 소장하고 있던 문서들은 1948년에 발생한 큰 화재로 인해 대부분의 전적을 이 때 소실하게 되었으며 현대로서는 화재시에 어느 정도의 전적이 소실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복 종택에는 결코 적지 않은 양의 전적이 남아 있으며 종택에 소장된 고문서와 고서는 조선 후기 향촌사회사, 유학사는 물론 고문헌학, 서지학 연구에 있어 커다란 보탬이 될 것으로 보인다. <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尙州 晉州鄭氏 愚伏宗宅 山水軒 所藏 典籍類의 내용과 성격」,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315쪽. </ref>
 
종택에서 소장하고 있던 문서들은 1948년에 발생한 큰 화재로 인해 대부분의 전적을 이 때 소실하게 되었으며 현대로서는 화재시에 어느 정도의 전적이 소실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복 종택에는 결코 적지 않은 양의 전적이 남아 있으며 종택에 소장된 고문서와 고서는 조선 후기 향촌사회사, 유학사는 물론 고문헌학, 서지학 연구에 있어 커다란 보탬이 될 것으로 보인다. <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尙州 晉州鄭氏 愚伏宗宅 山水軒 所藏 典籍類의 내용과 성격」,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315쪽. </ref>
  

2017년 10월 3일 (화) 22:06 판

진주정씨 우복종택()
[[file:|270px|thumb|center|]]
대표명칭 진주정씨 우복종택
유형 주택(한옥)


정의

진주정씨 우복가문의 종택이다.

정의

진주정씨 우복가문의 종택이다.

내용

진주정씨와 우복가문

우복종택은 영조 우복 정경세(1563~1633)의 덕을 기려 하사한 땅에 5세손 정주원이 1750년대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는 가옥이다. 진주정씨는 강씨, 하씨와 더불어 진양 3성(晉陽3姓)의 하나로 불린 진주의 토반, 거족이었다. 이들은 골시대 이래로 진주의 토착세력으로서 강력한 재지적 기반을 구축하는 과거와 관직을 통해 문호를 신장시켜 왔으며 강씨, 하씨 등 진주일대 대성들과의 혼맥을 바탕으로 사회적 기반을 확충해 나갔다. [1]

우복 종택 소장 고서와 고문서

정경세의 후손인 정재봉은 선대의 문적을 유지, 보존하는 데 성혈을 다하는 한편 한국학 연구를 촉진하는 차원에서 일체의 가문 소장 전적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대여하였다.[2] 이 중 한글문서인 연행만록이 2016년 장서각에서 진행한 한글특별전에 전시되었다. 종택에서 소장하고 있던 문서들은 1948년에 발생한 큰 화재로 인해 대부분의 전적을 이 때 소실하게 되었으며 현대로서는 화재시에 어느 정도의 전적이 소실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복 종택에는 결코 적지 않은 양의 전적이 남아 있으며 종택에 소장된 고문서와 고서는 조선 후기 향촌사회사, 유학사는 물론 고문헌학, 서지학 연구에 있어 커다란 보탬이 될 것으로 보인다. [3]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진주정씨 우복종택 진주정씨 A는 B와 관련이 있다
진주정시 우복종택 정경세 A는 B에서 이름을 땄다
정의생 상주 A는 B에 입향하였다 1300년대
정택 정의생 A는 B의 어버이이다
정택 진주정씨 우복종택 A는 B를 건립하였다
정의생 정의생의 처 A는 B의 남편이다
김득제 정의생의 처 A는 B의 어버이이다
정번 정의생 A는 B의 후손이다
정번 진주정씨 우복종택 A는 B를 이건하였다 1500년 전후
정경세 정번 A는 B의 후손이다
정주원 정경세 A는 B의 후손이다
정주원 진주정씨 우복종택 A는 B를 이건하였다 1750년 전후

시간 정보

시간정보 내용
1300년대 정택정의생을 필두로 한 진주정씨 우복종가가 상주로 입향하였다.
1500년 전후 정번이 율리로 종택을 이건하였다
1750년 전후 정주원이 종가를 우산으로 이건하였다.
1946년 종택에 발생한 큰 화재로 인해 문건의 절반 이상이 소실되었다

공간 정보

위도 경도 내용
36.475327 128.061774 경상북도 상주시 의서면에 틀:PAGENAGE이 있다

주석

  1.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尙州 晉州鄭氏 愚伏宗宅 山水軒 所藏 典籍類의 내용과 성격」,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268-9쪽.
  2.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尙州 晉州鄭氏 愚伏宗宅 山水軒 所藏 典籍類의 내용과 성격」,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287쪽.
  3.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尙州 晉州鄭氏 愚伏宗宅 山水軒 所藏 典籍類의 내용과 성격」,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3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