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월향 초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정의) |
(→초상의 제작 및 보관) |
||
19번째 줄: | 19번째 줄: | ||
=='''내용'''== | =='''내용'''== | ||
===초상의 제작 및 보관=== | ===초상의 제작 및 보관=== | ||
− | + | [[계월향 초상]]은 [[임진왜란]] 당시 [[평양성]]이 함락되었을 때 왜장의 목을 베고 죽어, 남쪽의 [[논개]]와 더불어 조선 여인의 충절을 대표하게 된 의기 [[계월향]]의 모습을 그린 초상이다. | |
− | 그림 우상단에는 “만력 임진년(1592) 왜군이 [[평양성]]을 함락시키자 평양부 기녀 [[계월향]]이 [[김응서]] 장군을 맞아들여 왜군의 부장([[고니시 유키나가]])을 참수하니, 사람들이 지금까지 의롭게 여긴다. 숭정 네 번째 을해년(1815) 여름 화상을 그려 [[평양 장향각|장향각]]에 걸고 해마다 한 차례 제사를 올린다.(義妓桂月香 萬曆壬辰 倭陷平壤城 府妓桂月香 邀入金將軍景瑞 斬倭副將 人至今義之 崇禎四乙亥夏 畵其像 揭于藏香閣 歲一祭之)”라고 적혀 있어 | + | |
− | 한 동안 행방을 알 수 없다가 2008년 일본 교토에서 발견되어 현재는 [[국립민속박물관]]에 | + | 그림 우상단에는 “만력 임진년(1592) 왜군이 [[평양성]]을 함락시키자 평양부 기녀 [[계월향]]이 [[김응서]] 장군을 맞아들여 왜군의 부장([[고니시 유키나가]])을 참수하니, 사람들이 지금까지 의롭게 여긴다. 숭정 네 번째 을해년(1815) 여름 화상을 그려 [[평양 장향각|장향각]]에 걸고 해마다 한 차례 제사를 올린다.(義妓桂月香 萬曆壬辰 倭陷平壤城 府妓桂月香 邀入金將軍景瑞 斬倭副將 人至今義之 崇禎四乙亥夏 畵其像 揭于藏香閣 歲一祭之)”라고 적혀 있어 그 제작 내력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림 옆으로는 [[계월향]]의 업적과 그를 기리는 글이 빼곡히 적혀 있다. 이 제기(題記)를 통해 [[계월향 초상]]이 1815년에 그려져서 평양의 [[평양 장향각|장향각]]에 봉안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해마다 한 차례 열리는 제사는 일제강점기까지도 지속되어 1921년 4월 22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평양 의열사]]에서 [[평양 기생권번]] 주최로 제수를 갖추고 배례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ref>조선미, 『한국의 초상화, 形과 影의 예술』, 돌베게, 2009, 541~544쪽.</ref><br/> |
− | + | ||
+ | 한 동안 행방을 알 수 없다가 2008년 일본 교토에서 발견되어 현재는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계월향 초상]]은 사후 200년이 지나서 그려졌고 제작 시기로 볼 때 인물의 얼굴을 핍진하게 묘사한 초상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제작된 여인 초상화의 매우 드문 예로 귀중한 가치를 지니며 짧은 [[저고리(여성)|저고리]]와 부푼 [[치마]], [[저고리(여성)|저고리]]에 달린 [[향노리개]] 등 19세기 초반 당시의 복식까지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작품이다. | ||
===초상에 묘사된 모습=== | ===초상에 묘사된 모습=== |
2017년 10월 3일 (화) 21:48 판
계월향 초상 | |
한자명칭 | 桂月香 肖像 |
---|---|
작가 | 미상 |
제작시기 | 1815년 |
소장처 | 국립민속박물관 |
유형 | 초상 |
크기(세로×가로) | 105x70cm |
목차
정의
임진왜란 당시의 의기(義妓) 계월향(桂月香, ?~1592)의 모습을 그린 초상.
내용
초상의 제작 및 보관
계월향 초상은 임진왜란 당시 평양성이 함락되었을 때 왜장의 목을 베고 죽어, 남쪽의 논개와 더불어 조선 여인의 충절을 대표하게 된 의기 계월향의 모습을 그린 초상이다.
그림 우상단에는 “만력 임진년(1592) 왜군이 평양성을 함락시키자 평양부 기녀 계월향이 김응서 장군을 맞아들여 왜군의 부장(고니시 유키나가)을 참수하니, 사람들이 지금까지 의롭게 여긴다. 숭정 네 번째 을해년(1815) 여름 화상을 그려 장향각에 걸고 해마다 한 차례 제사를 올린다.(義妓桂月香 萬曆壬辰 倭陷平壤城 府妓桂月香 邀入金將軍景瑞 斬倭副將 人至今義之 崇禎四乙亥夏 畵其像 揭于藏香閣 歲一祭之)”라고 적혀 있어 그 제작 내력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림 옆으로는 계월향의 업적과 그를 기리는 글이 빼곡히 적혀 있다. 이 제기(題記)를 통해 계월향 초상이 1815년에 그려져서 평양의 장향각에 봉안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해마다 한 차례 열리는 제사는 일제강점기까지도 지속되어 1921년 4월 22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평양 의열사에서 평양 기생권번 주최로 제수를 갖추고 배례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1]
한 동안 행방을 알 수 없다가 2008년 일본 교토에서 발견되어 현재는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계월향 초상은 사후 200년이 지나서 그려졌고 제작 시기로 볼 때 인물의 얼굴을 핍진하게 묘사한 초상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제작된 여인 초상화의 매우 드문 예로 귀중한 가치를 지니며 짧은 저고리와 부푼 치마, 저고리에 달린 향노리개 등 19세기 초반 당시의 복식까지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작품이다.
초상에 묘사된 모습
<계월향 초상>은 좌안팔분면의 전신좌상으로 바닥에 깔린 돗자리 방석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크게 땋아 올린 머리 모양은 계월향이 살았던 16세기 당시의 양식에 충실하지만 짧은 저고리와 부푼 치마를 입은 복식의 형식과 저고리에 달린 향노리개는 이 초상화가 그려졌던 19세기 초반에 유행했던 것들이다.[2]
안면묘사는 얼굴 윤곽, 코선, 목덜미 등을 따라 붉은 계열의 음영을 짙게 넣었으며, 코·목선·인중 등 특정 부분만을 강조하고 있는 특색이 있다. 계월향의 얼굴은 가는 눈썹, 얇은 눈꺼풀에 오똑하고 작은 코, 작고 붉은 입술을 하고 있으며 곱고 앳된 모습이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계월향 초상 | 초상 | A는 B에 해당한다 | A dcterms:type B |
계월향 초상 | 계월향 | A는 B를 묘사하였다 | A ekc:depicts B |
계월향 초상 | 평양 장향각 | A는 B에 봉안되어 있었다 | A ekc:formerLocation B |
계월향 초상 | 국립민속박물관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전신좌상 | 계월향 초상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저고리 | 계월향 초상 | A는 B에 나타난다 | A ekc:isShownOn B |
치마 | 계월향 초상 | A는 B에 나타난다 | A ekc:isShownOn B |
향노리개 | 계월향 초상 | A는 B에 나타난다 | A ekc:isShownOn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815년 | 계월향 초상이 제작되었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7.5816460 | 126.9789950 | 계월향 초상은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시각자료
주석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단행본
- 조선미, 『한국의 초상화, 形과 影의 예술』, 돌베게, 2009.
더 읽을거리
- 전시도록
- 국립중앙박물관, 『초상화의 비밀』, 국립중앙박물관,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