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정의) |
|||
38번째 줄: | 38번째 줄: | ||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시민]](金時敏) 장군이 성채를 보강하여 왜군의 공격을 대비하였다. 1592년 9월 왜군은 약 2만 5천 명의 병력으로 진주성으로 공격해 왔지만 김시민 장군에게 대패하여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가 벌어진 곳이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60328 진주성]",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두산백과.</ref><br/> |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시민]](金時敏) 장군이 성채를 보강하여 왜군의 공격을 대비하였다. 1592년 9월 왜군은 약 2만 5천 명의 병력으로 진주성으로 공격해 왔지만 김시민 장군에게 대패하여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가 벌어진 곳이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60328 진주성]",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두산백과.</ref><br/> | ||
1593년 6월 왜군은 곡창지대인 호남을 공략하여 군량미를 확보하고자 약 1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왔다. 진주성은 호남으로 가는 길목으로 진주성이 무너지면 호남을 잃게되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2차 전투에서는 군관민 6만이 최후까지 항쟁하여, 장렬한 최후를 마쳤고 왜군도 막대한 피해를 입어 호남으로 쳐들어갈 여력을 상실하였다. 이때 [[논개]](論介)는 적장을 안고 [[남강]](南江)에 투신한 일화가 유명하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60328 진주성]",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두산백과.</ref> | 1593년 6월 왜군은 곡창지대인 호남을 공략하여 군량미를 확보하고자 약 1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왔다. 진주성은 호남으로 가는 길목으로 진주성이 무너지면 호남을 잃게되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2차 전투에서는 군관민 6만이 최후까지 항쟁하여, 장렬한 최후를 마쳤고 왜군도 막대한 피해를 입어 호남으로 쳐들어갈 여력을 상실하였다. 이때 [[논개]](論介)는 적장을 안고 [[남강]](南江)에 투신한 일화가 유명하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60328 진주성]",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두산백과.</ref> | ||
+ | |||
+ | =='''지식 관계망'''== | ||
+ | ===관계정보=== | ||
+ | {|class="wikitable" style="background:white; text-align: center; width:100%;" | ||
+ | !style="width:30%"|항목A!!style="width:30%"|항목B!!style="width:25%"|관계!!style="width:15%"|비고 | ||
+ | |- | ||
+ | | [[진주전투]] || [[진주성]] || A는 B에서 일어났다 || A edm:happenedAt B | ||
+ | |- | ||
+ | | [[진주전투]] || [[1차 진주전투]]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
+ | |- | ||
+ | | [[진주전투]] || [[2차 진주전투]]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
+ | |- | ||
+ | | [[김시민]] || [[1차 진주전투]]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
+ | |- | ||
+ | | [[김성일]] || [[1차 진주전투]]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
+ | |- | ||
+ | | [[곽재우]] || [[1차 진주전투]]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
+ | |- | ||
+ | | [[최경회]] || [[2차 진주전투]]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
+ | |- | ||
+ | | [[김천일]] || [[2차 진주전투]]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
+ | |- | ||
+ | | [[최경회]] || [[논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
+ | |- | ||
+ | | [[김성일]] || [[진주전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
+ | |- | ||
+ | | [[임진왜란 3대 대첩]] || [[진주전투]]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
+ | |- | ||
+ | |} | ||
+ | |||
+ | ===공간정보=== | ||
+ | {|class="wikitable" style="background:white; width:100%; | ||
+ | !style="width:5%px"|위도!!style="width:5%px"|경도!!style="width:90%px"|내용 | ||
+ | |- | ||
+ | |35.206419 || 128.078344 || [[진주성]]은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에 위치한다. | ||
+ | |} | ||
+ | |||
+ | =='''시각자료'''== | ||
+ | ===갤러리=== | ||
+ | <gallery mode=packed caption="" heights=180px style="float:center" > | ||
+ | 파일:민족기록화 유적 진주성 촉석루 전경.jpg | 진주성 촉석루 전경<ref>민족기록화팀 (2016년 11월 13일 촬영)</ref> | ||
+ | |||
=='''주석'''== | =='''주석'''== |
2017년 9월 26일 (화) 17:03 판
진주성 (晉州城) |
|
대표명칭 | 진주성 |
---|---|
한자표기 | 晉州城 |
유형 | 성곽 |
시대 | 조선시대 |
지정번호 | 사적 제118호 |
지정일 | 1963년 01월 21일 |
관련인물 | 김시민,최경회,논개 |
|
목차
정의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본성동에 있는 성.[1]
내용
전략적 요충지
진주는 삼국시대 백제의 땅으로 신라와 접경한 최전선에 위치하여 두 나라 간에 전략적인 요충지로 치열한 공방전이 일어났던 곳이다. 삼국이 통일 된 이후에도 진주는 중요한 거점으로 인식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를 섬멸하기 위한 기지로서 역할했다. 조선시대에도 진주는 그 중요성이 높았으며 경상도와 호남을 연결하는 요충지였다. 조선시대에는 도호부가 설치되었고 경상우병영의 역할을 담당했다.[2]
진주성은 백제 때 건설되었으며 당시에는 거열성지(居烈城址)였다고 하며, 산성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동쪽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강변 절벽 위에 성채가 만들어졌고 서쪽으로는 하천이 있어 천혜의 요새였다.[3]
역사적 변천
1379년(우왕 5)에 왜구들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강주진장 배극렴이 진주목사 김중광에게 공문을 보내어 그때까지 토성이었던 촉석성을 석축으로 수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4]
임진왜란 직전인 선조 24년(1591)에는 영·호남의 읍성을 대대적으로 고쳐 쌓았는데, 경상도관찰사 김수(金睟)가 옛 성이 좁다고 하면서 동쪽을 넓혀 외성을 두었다. 1593년 이후에는 경상좌도수군절도사 이수일(李守一)이 진영을 촉석성으로 옮기고, 김수가 쌓은 성이 너무 넓어 지키기 어렵다고 하면서 성 안에 여러 시설을 두었다. 내성을 쌓고서 대홍문을 설치하였으며, 촉석과 관탕의 두 둔덕을 가로질러 동쪽과 북쪽에 홍문을 설치하였다.[5]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패했을 때 옛 북문과 신북문, 남문에도 옹성을 축조하고 근대전에 적합하도록 내성에 이어 지금의 너비로 다시 쌓았다. 1605년(선조 38) 병사 이수일(李守一)이 진을 성 내로 옮기고 성이 너무 넓어 수비가 곤란하다 하여 내성을 구축하였다. 1607년에는 병사 김태허(金太虛)가 포루 12개를 증축하였다.[6]
지금의 진주성은 1970년대에 진주성 정화사업을 거쳐 복원 정비된 것이다. 그 뒤에도 발굴이 진행되어 기록에 전하는 내부 시설이 일부 밝혀졌다. 특히 1999년에 진주성 공북문터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는데, 그 결과 공북문 받침돌 아래에서 약 80㎝ 이상되는 판축층이 확인되었고, 그 아래에서는 저습지도 발견되었다.[7]
임진왜란과 진주성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시민(金時敏) 장군이 성채를 보강하여 왜군의 공격을 대비하였다. 1592년 9월 왜군은 약 2만 5천 명의 병력으로 진주성으로 공격해 왔지만 김시민 장군에게 대패하여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가 벌어진 곳이다.[8]
1593년 6월 왜군은 곡창지대인 호남을 공략하여 군량미를 확보하고자 약 1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왔다. 진주성은 호남으로 가는 길목으로 진주성이 무너지면 호남을 잃게되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2차 전투에서는 군관민 6만이 최후까지 항쟁하여, 장렬한 최후를 마쳤고 왜군도 막대한 피해를 입어 호남으로 쳐들어갈 여력을 상실하였다. 이때 논개(論介)는 적장을 안고 남강(南江)에 투신한 일화가 유명하다.[9]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진주전투 | 진주성 | A는 B에서 일어났다 | A edm:happenedAt B |
진주전투 | 1차 진주전투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진주전투 | 2차 진주전투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김시민 | 1차 진주전투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김성일 | 1차 진주전투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곽재우 | 1차 진주전투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최경회 | 2차 진주전투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김천일 | 2차 진주전투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최경회 | 논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김성일 | 진주전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임진왜란 3대 대첩 | 진주전투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5.206419 | 128.078344 | 진주성은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에 위치한다. |
시각자료
갤러리
<gallery mode=packed caption="" heights=180px style="float:center" > 파일:민족기록화 유적 진주성 촉석루 전경.jpg | 진주성 촉석루 전경[10]
주석
- ↑ "진주성",
『doopedia』online .두산백과. - ↑ "진주성",
『doopedia』online .두산백과. - ↑ "진주성",
『doopedia』online .두산백과. - ↑ 정의도, "진주성",
『디지털진주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길식, "진주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 "진주성", 문화원형라이브러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 ↑ 김길식, "진주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 "진주성",
『doopedia』online .두산백과. - ↑ "진주성",
『doopedia』online .두산백과. - ↑ 민족기록화팀 (2016년 11월 13일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