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랑"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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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승려정보 |사진= |사진출처= |대표명칭=탁연 |영문명칭= |한자=卓然 |생년= |몰년= |시호= |호=법운(法雲), 법유자(法遊子) |휘= |법호= |탑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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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25일 (월) 10:11 판
탁연(卓然) | |
대표명칭 | 탁연 |
---|---|
한자 | 卓然 |
호 | 법운(法雲), 법유자(法遊子) |
정의
신라 말·고려 초의 승려.
내용
희랑은 신라 헌강왕 때 해인사(海印寺)에서 최치원(崔致遠)과 시문으로 사귀었고, 『화엄경(華嚴經)』에 정통했다.[1] 희랑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복전(福田 : 歸依를 받았다는 뜻)이 되었고, 관혜는 후백제 견훤(甄萱)의 복전이 되었다. 관혜와 그 문도들은 남악 화엄사(華嚴寺)를 근거로 활동하였으며, 희랑과 그 문도들은 북악 부석사(浮石寺)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2]
두 파의 쟁점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고, 다만 그 분파가 매우 심각하였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고려 때 균여(均如)는 그 조화를 모색한 인물이었다. 『균여전』에는 “이 두 사람은 신심(信心)을 받아 향화(香火)를 올리며 서원(誓願)을 맺었으나 서원이 이미 달라졌으니 어찌 주장이 같을 수 있으랴! 문도들에게 내려가면서 점차 물과 불처럼 되었다.[3]
즉, 신라 말기에 이르러 화엄학은 부석사와 화엄사의 두 파로 나누어졌으며, 서로 정통임을 주장하는 폐해가 노골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해인사의 희랑대(希朗臺)는 희랑이 머무르면서 수도하던 곳이라고 전해진다.[4]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 탁연 | A는 B가 비문을 썼다 | A ekc:calligrapher B |
탁연 | 수선사 | A는 B에서 수행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탁연 | 최자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탁연 | 보한집 | A는 B에 언급되었다 | A ekc:mentions B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각주
- ↑ 두산백과
- ↑ 정병조, "희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정병조, "희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정병조, "희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정병조, "희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