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자
최자(崔滋) | |
대표명칭 | 최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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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崔滋 |
생몰년 | 1188년(명종 18)-1260년(원종 1) |
본관 | 해주(海州) |
이칭 | 최종유(崔宗裕), 최안(崔安) |
시호 | 문청(文淸) |
호 | 동산수(東山叟) |
자 | 수덕(樹德) |
부 | 최민(崔敏) |
정의
고려 후기의 문신.
내용
1212년(강종 1) 급제하여 치적이 우수한 것으로 평가되어 국자감학유(國子監學諭)에 올랐는데 그후 오랫동안 발탁되지 못하다가 「우미인초가(虞美人草歌)」, 「수정배시(水精盃詩)」가 이규보(李奎報)에게 인정받아, 그의 추천으로 최씨 정권에서 이규보를 이어 문병(文柄)을 잡게 되었다. 급전도감녹사(給田都監錄事)로 일하는 동안 그 성실함과 민첩성이 집정자 최우(崔瑀)의 인정을 받았으며, 고종 때 정언(正言)을 거쳐 상주목사(尙州牧使)가 되어 선정(善政)을 베풀고 전중소감(殿中少監)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가 되기도 했다.[1] 최씨정권이 무너지자 수상으로서 난국을 잘 타개하였다. 1259년 1월 몽고의 침입이 있자 고관들 사이에서는 항복과 항전을 두고 중론이 분분하였다. 이 때 강화도는 땅이 넓고 사람이 적어 지키기 어렵다고 하면서 항복할 것을 주장하였다.[2]
저서
최자의 저서로 『최문충공가집(崔文忠公家集)』 10권이 있었으나 전하지 않는다. 『속파한집(續破閑集)』(보한집(補閑集)으로 고쳐 부름) 3권이 현전한다.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 시 1편이, 『동문선(東文選)』에 부(賦) 2편, 시 10편, 기타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3]
최자는 대체로 이규보의 문학론(文學論)을 답습하고 있는데 그가 주장한 주기론(主氣論)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최자는 문(文)이란 도(道)를 밟아 들어가는 문이라고 했는데, 이는 뒷날 이제현(李齊賢)의 문이재도(文以載道)를 나오게 한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런 사상은 후대 성리학의 득세와 함께 고려말과 조선초기의 중요한 문학이론으로 자리잡았다.[4]
비문의 찬자
최자가 지은 비문으로는, 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康津 月南寺址 眞覺國師碑), 강진 백련사 원묘국사비(康津 白蓮寺 圓妙國師碑) 등이 있다.
지식 관계망
- 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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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 최자 |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 |
강진 백련사 원묘국사비 | 최자 |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 |
최자 | 이규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주석
- ↑ 권영민, 『네이버고전문학사전』, 2004. 온라인 참조: "최자", 고전문학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박노춘, "최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박노춘, "최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권영민, 『네이버고전문학사전』, 2004. 온라인 참조: "최자", 고전문학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