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증 초상(반신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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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산의 [[유봉영당|유봉영당(酉峯影堂)]]에는 다수의 윤증 초상이 전해온다. 이 중에서 1744년에 [[장경주]]가 그린 측면전신좌상 1점과 [[장경주]]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반신상 2점, 1788년 [[이명기]]가 그린 측면전신좌상 2점과 윤증 초상의 제작에 대한 기록을 담은 책자인『[[영당기적|영당기적(影堂紀蹟)]]』이 일괄로 보물 제1495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당기적|영당기적(影堂紀蹟)]]』은 윤증 초상의 제작과 관련된 기록을 담은 필사본으로, 1711년(숙종 37) [[변량|변량(卞良)]]이 [[윤증]]의 초상을 처음으로 그렸던 사례부터 1744년(영조 20) [[장경주]], 1788년(정조 12) [[이명기]], 1885년(고종 22) [[이한철|이한철(李漢喆)]]이 모사할 때까지 4차례의 제작 사례를 기록하였다. 여기에는 제작 일정 및 제작된 초상의 수, 구본 및 신본의 봉안과정 등을 상세히 담고 있다. 이 외에도 1919년 및 1935년에 제작된 [[윤증]]의 전신 좌상 및 소묘 초본 여러 점이 함께 전해오고 있다. | + | 논산의 [[유봉영당|유봉영당(酉峯影堂)]]에는 다수의 윤증 초상이 전해온다. 이 중에서 1744년에 [[장경주]]가 그린 측면전신좌상 1점과 [[장경주]]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반신상 2점, 1788년 [[이명기]]가 그린 측면전신좌상 2점과 윤증 초상의 제작에 대한 기록을 담은 책자인『[[영당기적|영당기적(影堂紀蹟)]]』이 일괄로 보물 제1495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당기적|영당기적(影堂紀蹟)]]』은 윤증 초상의 제작과 관련된 기록을 담은 필사본으로, 1711년(숙종 37) [[변량|변량(卞良)]]이 [[윤증]]의 초상을 처음으로 그렸던 사례부터 1744년(영조 20) [[장경주]], 1788년(정조 12) [[이명기]], 1885년(고종 22) [[이한철|이한철(李漢喆)]]이 모사할 때까지 4차례의 제작 사례를 기록하였다. 여기에는 제작 일정 및 제작된 초상의 수, 구본 및 신본의 봉안과정 등을 상세히 담고 있다. 이 외에도 1919년 및 1935년에 제작된 [[윤증]]의 전신 좌상 및 소묘 초본 여러 점이 함께 전해오고 있다.<br/> |
− | [[윤증]]의 초상화가 처음 그려졌던 것은 살아있을 때인 1711년으로 당시 국수라 칭해졌던 [[변상벽]]이 그렸다. [[윤증]]은 원래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반대했지만, 그의 문인들이 [[향음례]] 동안 화사로 하여금 군중 사이에 섞여 [[윤증]]의 안색을 바라보고, 또 창문 틈으로 엿보게 하여 초를 잡도록 하였고, 1712년 4월에 작업이 시작되어 한 달 보름 후 마침내 정면상과 측면상 두 본이 완성되었다. 제작 당시부터 상당히 핍진한 작품으로 평가되었으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이 후 30여년 후 초상의 색이 바래고 낡아서 1744년 4월 당시 어진화사였던 [[장경주]]를 불러 정면상 1점과 측면상 3점을 이모하게 했다.<ref>조선미,『한국의 초상화, 形과 影의 예술』, 돌베게, 2009, 211~216쪽.</ref> | + | |
− | 이 윤증 초상은 [[사방관]]에 도포 차림으로 정면관을 한 반신상이다. 화면에 아무런 [[묵서]]가 남아있지 않아 제작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정면상과 측면상은 같은 비단에 같은 화가의 솜씨로 보이는데 [[장경주]]가 그린 측면전신좌상과 기법이 유사하여 [[장경주]]가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ref>문화재청, 『한국의 초상화- 역사 속의 인물과 조우하다』, 눌와, 2007, 288쪽.</ref> | + | [[윤증]]의 초상화가 처음 그려졌던 것은 살아있을 때인 1711년으로 당시 국수라 칭해졌던 [[변상벽]]이 그렸다. [[윤증]]은 원래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반대했지만, 그의 문인들이 [[향음례]] 동안 화사로 하여금 군중 사이에 섞여 [[윤증]]의 안색을 바라보고, 또 창문 틈으로 엿보게 하여 초를 잡도록 하였고, 1712년 4월에 작업이 시작되어 한 달 보름 후 마침내 정면상과 측면상 두 본이 완성되었다. 제작 당시부터 상당히 핍진한 작품으로 평가되었으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이 후 30여년 후 초상의 색이 바래고 낡아서 1744년 4월 당시 어진화사였던 [[장경주]]를 불러 정면상 1점과 측면상 3점을 이모하게 했다.<ref>조선미,『한국의 초상화, 形과 影의 예술』, 돌베게, 2009, 211~216쪽.</ref><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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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윤증]] 초상은 [[사방관]]에 도포 차림으로 정면관을 한 반신상이다. 화면에 아무런 [[묵서]]가 남아있지 않아 제작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정면상과 측면상은 같은 비단에 같은 화가의 솜씨로 보이는데 [[장경주]]가 그린 측면전신좌상과 기법이 유사하여 [[장경주]]가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ref>문화재청, 『한국의 초상화- 역사 속의 인물과 조우하다』, 눌와, 2007, 288쪽.</ref><br/> | ||
윤증 초상 반신상 두 점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소론의 영수인 [[윤증]]을 그린 그림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초상화 자체가 지닌 회화적 격조도 높은 뛰어난 작품이다. | 윤증 초상 반신상 두 점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소론의 영수인 [[윤증]]을 그린 그림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초상화 자체가 지닌 회화적 격조도 높은 뛰어난 작품이다. | ||
2017년 9월 20일 (수) 18:13 판
윤증 초상 | |
한자명칭 | 尹拯 肖像 |
---|---|
작가 | 장경주 추정 |
제작시기 | 1744년 |
소장처 | 충남역사문화연구원 |
문화재지정사항 | 보물 제1495호 |
유형 | 초상 |
크기(세로×가로) | 59.0×36.2㎝ |
목차
정의
조선 후기 학자 윤증(尹拯, 1629∼1714)의 모습을 그린 초상.
내용
초상의 제작 및 보관
논산의 유봉영당(酉峯影堂)에는 다수의 윤증 초상이 전해온다. 이 중에서 1744년에 장경주가 그린 측면전신좌상 1점과 장경주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반신상 2점, 1788년 이명기가 그린 측면전신좌상 2점과 윤증 초상의 제작에 대한 기록을 담은 책자인『영당기적(影堂紀蹟)』이 일괄로 보물 제1495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당기적(影堂紀蹟)』은 윤증 초상의 제작과 관련된 기록을 담은 필사본으로, 1711년(숙종 37) 변량(卞良)이 윤증의 초상을 처음으로 그렸던 사례부터 1744년(영조 20) 장경주, 1788년(정조 12) 이명기, 1885년(고종 22) 이한철(李漢喆)이 모사할 때까지 4차례의 제작 사례를 기록하였다. 여기에는 제작 일정 및 제작된 초상의 수, 구본 및 신본의 봉안과정 등을 상세히 담고 있다. 이 외에도 1919년 및 1935년에 제작된 윤증의 전신 좌상 및 소묘 초본 여러 점이 함께 전해오고 있다.
윤증의 초상화가 처음 그려졌던 것은 살아있을 때인 1711년으로 당시 국수라 칭해졌던 변상벽이 그렸다. 윤증은 원래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반대했지만, 그의 문인들이 향음례 동안 화사로 하여금 군중 사이에 섞여 윤증의 안색을 바라보고, 또 창문 틈으로 엿보게 하여 초를 잡도록 하였고, 1712년 4월에 작업이 시작되어 한 달 보름 후 마침내 정면상과 측면상 두 본이 완성되었다. 제작 당시부터 상당히 핍진한 작품으로 평가되었으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이 후 30여년 후 초상의 색이 바래고 낡아서 1744년 4월 당시 어진화사였던 장경주를 불러 정면상 1점과 측면상 3점을 이모하게 했다.[1]
이 윤증 초상은 사방관에 도포 차림으로 정면관을 한 반신상이다. 화면에 아무런 묵서가 남아있지 않아 제작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정면상과 측면상은 같은 비단에 같은 화가의 솜씨로 보이는데 장경주가 그린 측면전신좌상과 기법이 유사하여 장경주가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2]
윤증 초상 반신상 두 점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소론의 영수인 윤증을 그린 그림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초상화 자체가 지닌 회화적 격조도 높은 뛰어난 작품이다.
공신도상에 묘사된 모습
정면상으로 그려진 <윤증 초상>반신상은 사방관을 쓰고 도포를 입고 입는 평복 차림의 모습이다. 사방관은 평면적이고 새까맣게 칠해져 속 안이 들여다 보이지 않는다. 측면상의 <윤증 초상>반신상은 굵은 발의 사방관 사이로 대머리와 상투가 비치는 점이 차이가 있다. 둘 가 의습은 담묵세필로 간략히 처리하였다.얼굴은 선으로 이목구비와 외곽선을 잡고 선염을 사용하여 묘사하였다. 윤증의 얼굴은 사방관 사이로 비치는 민머리가 특징적이며 치켜 올라간 양쪽 눈, 긴 코, 붉은 입술과 깊게 패인 팔자주름과 흰 수염에서 꼬장꼬장한 풍모가 느껴진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신숙주 공신도상 | 공신도상 | A는 B에 해당한다 | |
신숙주 공신도상 | 신숙주 | A는 B를 묘사하였다 | |
신숙주 공신도상 | 구봉영당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
신숙주 공신도상 | 충북 묵정영당 소장본 신숙주 초상 | A는 B로 이모되었다 | |
신숙주 공신도상 | 평택 고령신씨 사당본 신숙주 초상 | A는 B로 이모되었다 | |
좌안팔분면 | 신숙주 공신도상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전신교의좌상 | 신숙주 공신도상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장황 | 신숙주 공신도상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용재총화 | 신숙주 공신도상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성현 | 용재총화 | A는 B를 썼다 | |
오사모 | 신숙주 공신도상 | A는 B에 나타난다 | |
녹포단령 | 신숙주 공신도상 | A는 B에 나타난다 | |
족좌대 | 신숙주 공신도상 | A는 B에 나타난다 | |
백목화 | 신숙주 공신도상 | A는 B에 나타난다 | |
백한흉배 | 신숙주 공신도상 | A는 B에 나타난다 | |
삽은대 | 신숙주 공신도상 | A는 B에 나타난다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493년 무렵 | 신숙주 공신도상이 제작되었다. |
1977년 | 신숙주 공신도상이 보물 제613호로 지정되었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6.561718 | 127.557204 | 신숙주 공신도상은 구봉영당(九峰影堂)에 봉안되어 있다. |
시각자료
주석
참고문헌
유용한 정보
- 웹자원
- "신숙주 초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신숙주 초상",
더 읽을거리
- 전시도록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조선의 공신』, 장서각, 2012.
- 단행본
- 문화재청, 『한국의 초상화 : 역사속의 인물과 조우하다』, 눌와, 2007.
- 논문
- 조선미, 「조선왕조시대의 공신도상에 관하여」, 『미술사학연구』151호, 한국미술사학회,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