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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성과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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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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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왕 때의 고승 범일(梵日)이 강릉의 굴산사((崛山寺)에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킴으로써 사굴산파 또는 굴산선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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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조(開祖)인 범일은 831년(흥덕왕 6) 당나라로 건너가서 제안(齊安)의 선법을 이어받아 847년(문성왕 9) 귀국하였으며, 곧바로 굴산사를 창건하여 40여 년을 살면서 선법을 전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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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일의 법맥을 이은 대표적인 제자로는 개청(開淸)·행적(行寂) 등 10대제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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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백-선종구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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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적은 870년에 중국에 들어가 석상(石霜, 慶諸)의 법을 받아 855년(헌강왕 11)에 귀국하였다. 처음에 그는 김해부의 소충자·소율희의 후원을 받았고, 915년에 신덕왕의 요청으로 실제사(實際寺)에 거주하였는데, 이 절은 왕건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일심(一心)을 강조하는 사상 경향을 가져, “일심을 보존하라.”든가 “한 번 지켜 잃지 말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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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청은 범일 문하에 있다가 889년(진성왕 3)에 강릉 보현사(普賢寺)에 거주하였는데, 이때 명주군사 왕순식과 인연을 맺었으며, 그 뒤 왕건의 귀의를 받았다. 한편, 범일의 문인인 신의가 오대산 자장의 구거(舊居:후의 月精寺)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로 보면, 사굴산문은 강릉과 오대산 일대에 세력을 미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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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일]]은 831년 중국에 들어가, 마조의 제자인 염관제안 스님의 법을 받아 846년에 귀국하였다. 명주도독 김공(金公)의 지원으로 굴산사에 주석하였으며 김주원계의 후손과도 관계가 있었다. 신라 왕실과는 대립적인 경향을 보였는데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 등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산문이 북쪽 변방에 위치했고 일찍부터 명주 지역은 반신라적인 성향이 강한 곳이었다. 더욱이 스님이 중국에 있을 때 황제가 단행한 회창폐불(會昌廢佛)을 경험했는데, 이 폐불 상황에서도 지방관들이 불교를 옹호할 뿐만 아니라 범일 스님을 도와주었다. 이 경험 때문에 지방관들과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다른 산문들과 달리 신라 왕실에 대하여 배타적인 행동을 취하였다.<ref>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구산선문의 형성과 전개", 『한국 불교사 - 조계종사를 중심으로』, (주)조계종출판사, 2015, 90-91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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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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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굴산문의 승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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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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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사굴산파 고승으로는 예종 때의 혜소(慧炤)를 들 수 있다. 그는 사굴산파의 소속으로 송나라에 가서 정인(淨因)의 법을 받아 귀국한 뒤 광명사(廣明寺)와 순천의 정혜사(定慧寺)에서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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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 가운데 탄연(坦然)과 지인(之印)은 이 문파를 크게 진흥시켰다. 탄연은 산청의 단속사(斷俗寺)에서 선풍을 크게 떨쳤고, 예종의 왕자였던 지인은 선법 외에도 교관(敎觀)과 시문(詩文)에도 능통하였다고 한다. 특히 고려 중기에 선을 크게 중흥시킨 지눌(知訥)도 사굴산파 출신이다.
  
원래 사굴산은 기사굴(耆闍崛), 굴산(崛山)이라고도 하는데, 범어 Grdhra-Kuta의 음역으로 영취산(靈鷲山)이라는 의미이다.<ref>정영식, "통효범일", 『조당집 읽기』, 운주사, 2016, 289쪽.</ref>
 
  
 
=='''지식관계망'''==
 
=='''지식관계망'''==

2017년 9월 10일 (일) 17:51 판

사굴산문
(闍崛山門)
대표명칭 사굴산문
한자표기 闍崛山門
이칭 사굴산파(闍崛山派), 굴산선파(崛山禪派)
관련개념 구산선문(九山禪門)



정의

강원도 강릉의 굴산사(崛山寺)를 중심으로 일어난 선종구산문(禪宗九山門)의 하나.

내용

형성과 전개

(민백) 문성왕 때의 고승 범일(梵日)이 강릉의 굴산사((崛山寺)에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킴으로써 사굴산파 또는 굴산선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개조(開祖)인 범일은 831년(흥덕왕 6) 당나라로 건너가서 제안(齊安)의 선법을 이어받아 847년(문성왕 9) 귀국하였으며, 곧바로 굴산사를 창건하여 40여 년을 살면서 선법을 전파하였다. 범일의 법맥을 이은 대표적인 제자로는 개청(開淸)·행적(行寂) 등 10대제자가 있었다.

(민백-선종구산문) 행적은 870년에 중국에 들어가 석상(石霜, 慶諸)의 법을 받아 855년(헌강왕 11)에 귀국하였다. 처음에 그는 김해부의 소충자·소율희의 후원을 받았고, 915년에 신덕왕의 요청으로 실제사(實際寺)에 거주하였는데, 이 절은 왕건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일심(一心)을 강조하는 사상 경향을 가져, “일심을 보존하라.”든가 “한 번 지켜 잃지 말라.”고 하였다. 개청은 범일 문하에 있다가 889년(진성왕 3)에 강릉 보현사(普賢寺)에 거주하였는데, 이때 명주군사 왕순식과 인연을 맺었으며, 그 뒤 왕건의 귀의를 받았다. 한편, 범일의 문인인 신의가 오대산 자장의 구거(舊居:후의 月精寺)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로 보면, 사굴산문은 강릉과 오대산 일대에 세력을 미치고 있었다.


범일은 831년 중국에 들어가, 마조의 제자인 염관제안 스님의 법을 받아 846년에 귀국하였다. 명주도독 김공(金公)의 지원으로 굴산사에 주석하였으며 김주원계의 후손과도 관계가 있었다. 신라 왕실과는 대립적인 경향을 보였는데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 등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산문이 북쪽 변방에 위치했고 일찍부터 명주 지역은 반신라적인 성향이 강한 곳이었다. 더욱이 스님이 중국에 있을 때 황제가 단행한 회창폐불(會昌廢佛)을 경험했는데, 이 폐불 상황에서도 지방관들이 불교를 옹호할 뿐만 아니라 범일 스님을 도와주었다. 이 경험 때문에 지방관들과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다른 산문들과 달리 신라 왕실에 대하여 배타적인 행동을 취하였다.[1]

후원세력

사굴산문의 승려들

(민백) 고려시대의 사굴산파 고승으로는 예종 때의 혜소(慧炤)를 들 수 있다. 그는 사굴산파의 소속으로 송나라에 가서 정인(淨因)의 법을 받아 귀국한 뒤 광명사(廣明寺)와 순천의 정혜사(定慧寺)에서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제자들 가운데 탄연(坦然)과 지인(之印)은 이 문파를 크게 진흥시켰다. 탄연은 산청의 단속사(斷俗寺)에서 선풍을 크게 떨쳤고, 예종의 왕자였던 지인은 선법 외에도 교관(敎觀)과 시문(詩文)에도 능통하였다고 한다. 특히 고려 중기에 선을 크게 중흥시킨 지눌(知訥)도 사굴산파 출신이다.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시각자료

주석

  1.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구산선문의 형성과 전개", 『한국 불교사 - 조계종사를 중심으로』, (주)조계종출판사, 2015, 90-91쪽.

참고문헌

  • 김두진, "선종구산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김방용, 「려말 선초 사굴산문과 가지산문에 관한 연구」, 『한국종교사연구』 Vol.9, 한국종교사학회, 2001, 75-98쪽.
  • 김영태, "사굴산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6월 10일.
  • 김흥삼, 「나말려초 굴산문 신앙의 여러 모습」, 『역사와 현실』 No.41, 한국역사연구회, 2001, 151-181쪽.
  • 김흥삼, "사굴산문", 『디지털강릉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구산선문의 형성과 전개", 『한국 불교사 - 조계종사를 중심으로』, (주)조계종출판사, 2015, 83-99쪽.
  • 이일야, "사굴산문", 『해주에서 장흥까지 아홉개의 산문이 열리다』, (주)조계종출판사, 2016, 147-175쪽.
  • 정동락, 「범일의 굴산문 개창과 성장기반 조성」, 『신라사학보』 No.35, 신라사학회, 2015, 65-98쪽.
  • 조범환, 「신라말 고려초 굴산문의 성장과 분화」, 『문화사학』 No.37, 한국문화사학회, 2012, 45-63쪽.
  • 홍성익, 「신라말 강원지역 선종의 전래와 정착과정」, 『신라사학보』 No.33, 신라사학회, 2015, 223-258쪽.
  • 황인규, 「고려전기 사굴산문계 고승과 선종계」, 『한국선학』 Vol.17, 한국선학회, 2007, 91-125쪽.
  • 황인규, 「고려후기 수선사와 사굴산문: 고승의 존재양상과 그 동향을 중심으로」, 『보조사상』 Vol.28, 보조사상연구원, 2007, 363-39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