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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대사 긍양靜眞大師 兢讓)은 878년([[신라 헌강왕|헌강왕]] 4)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왕씨(王氏)로 할아버지는 숙장(淑長), 아버지는 양길(亮吉)이고, 어머니는 김씨(金氏)이다. 긍양의 고조와 증조부 때부터 군읍(郡邑)의 토호였으므로, 집집마다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ref>"[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4&cp_code=rp0703&index_id=rp07030128&content_id=rp070301280001&search_left_menu=2 긍양]", 디지털 삼국유사 사전 박물지 시범개발,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원형라이브러리』<sup>online</sup></online></html>, 한국콘텐츠진흥원.</ref> | 정진대사 긍양靜眞大師 兢讓)은 878년([[신라 헌강왕|헌강왕]] 4)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왕씨(王氏)로 할아버지는 숙장(淑長), 아버지는 양길(亮吉)이고, 어머니는 김씨(金氏)이다. 긍양의 고조와 증조부 때부터 군읍(郡邑)의 토호였으므로, 집집마다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ref>"[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4&cp_code=rp0703&index_id=rp07030128&content_id=rp070301280001&search_left_menu=2 긍양]", 디지털 삼국유사 사전 박물지 시범개발,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원형라이브러리』<sup>online</sup></online></html>, 한국콘텐츠진흥원.</ref> | ||
{{blockquote | {{blockquote | ||
− | |대사의 휘는 긍양(兢讓)이요 | + | |대사의 휘는 긍양(兢讓)이요 속성은 왕씨로 공주 사람이다. 할아버지는 숙장(淑長)이고, 아버지는 양길(亮吉)인데, 두 분 모두 인의(仁義)에 힘써 자신을 이루려는 마음을 지녔으며, 덕을 쌓고 공을 넉넉히 하여 자손에 넘겨주는 업(業)을 귀하게 하였다. 힘을 다해 관직에 복무했고, 서리와 눈을 품은듯 마음을 깨끗이 하였다.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어른이라 칭하였고, 이웃 마을에서는 명예를 잘 지켜 현명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고조·증조는 모두 군읍(郡邑)의 호부(豪富)로서 그 집안(戶)을 알기 어렵지 않으므로 싣지 않는다. 어머니는 김씨이다. 여자의 공에 대해서는 상대할 사람이 없을 정도이고, 아내의 도리에 대해서도 규범이 있었다. 머리카락을 자르는 심정으로 순순히 정을 지키려 하였고, 학문을 중도에 그만두는 것을 경계하여 절개에 힘썼다. 스님과 부처님께 공경을 다하였고, 시부모 섬기기에 예를 다하였다. |
− | |출처= | + | |출처=임세권, 이우태,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한국국학진흥원, 2014, 18쪽. 온라인 참조: "[http://www.krpia.co.kr/product/main?plctId=PLCT00006041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누리미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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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양의 어머니는 어느 날 밤 별이 흘러 와서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을 하였다.<ref>"[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4&cp_code=rp0703&index_id=rp07030128&content_id=rp070301280001&search_left_menu=2 긍양]", 디지털 삼국유사 사전 박물지 시범개발,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원형라이브러리』<sup>online</sup></online></html>, 한국콘텐츠진흥원.</ref> | 긍양의 어머니는 어느 날 밤 별이 흘러 와서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을 하였다.<ref>"[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4&cp_code=rp0703&index_id=rp07030128&content_id=rp070301280001&search_left_menu=2 긍양]", 디지털 삼국유사 사전 박물지 시범개발,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원형라이브러리』<sup>online</sup></online></html>, 한국콘텐츠진흥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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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꿈에 유성이 품속에 들어 왔는데 크기가 항아리만했고, 색은 누런 윤택이 났다. 이로 인하여 임신하였다. 이 때문에 냄새난다는 음식을 끊고 삼가며 보호하기에 힘써 태교를 끊지 않았는데 기간이 좀 지나 태어났다. |
− | |출처= | + | |출처=임세권, 이우태,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한국국학진흥원, 2014, 18쪽. 온라인 참조: "[http://www.krpia.co.kr/product/main?plctId=PLCT00006041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누리미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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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양은 타고난 모습이 특이하였으며 어려서부터 나이든 사람과 같이 점잖았다.<ref>"[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4&cp_code=rp0703&index_id=rp07030128&content_id=rp070301280001&search_left_menu=2 긍양]", 디지털 삼국유사 사전 박물지 시범개발,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원형라이브러리』<sup>online</sup></online></html>, 한국콘텐츠진흥원.</ref> | 긍양은 타고난 모습이 특이하였으며 어려서부터 나이든 사람과 같이 점잖았다.<ref>"[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4&cp_code=rp0703&index_id=rp07030128&content_id=rp070301280001&search_left_menu=2 긍양]", 디지털 삼국유사 사전 박물지 시범개발,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원형라이브러리』<sup>online</sup></online></html>, 한국콘텐츠진흥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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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대사는 타고난 성품이 특이하였고, 마음과 얼굴 빛이 아름답고 기묘했다. 아이일 때부터 일곱살 무렵에 이를 때까지 어린애 같은 행동이 없어서 마치 나이든 것 같았다. 앉을 때에는 반드시 가부좌를 하고 행할 때는 모름지기 합장을 하였다. 모래를 모아 담을 쌓으면 불탑과 비슷한 것을 만들었고, 나뭇잎으 모으고 꽃을 따면 공양하는 공구(供具)와 비슷한 것을 만들어 진열하였다. 공부할 나이에 이르러서는 날마다 경전을 끼고 있었따. 집에서는 시와 예를 배웠고, 학교 강당에 가서는 강론을 들었는데, 가죽 끈이 세 번 끊어질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여 (漢代의) 구류가(九流家)보다 더하다고 할 수 있었다. |
− | |출처= | + | |출처=임세권, 이우태,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한국국학진흥원, 2014, 18쪽. 온라인 참조: "[http://www.krpia.co.kr/product/main?plctId=PLCT00006041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누리미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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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양은 공주 남혈원(南穴院)으로 가서 [[여해|여해선사(如解禪師)]]의 제자가 되어 출가하였다. | 긍양은 공주 남혈원(南穴院)으로 가서 [[여해|여해선사(如解禪師)]]의 제자가 되어 출가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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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간절히 아뢰어 출가(出家)하여 입도할 것을 진실로 청하였다. (그리하여) 공주 서혈원(西穴院) 여해선사(如解禪師)에게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몸을 머물렀다. 뜻은 아침에 듣는 데 두었고 배움은 날마다 넘치기를 기대하였다. 실로 배전의 공을 들었으니 누가 감이 더디다 하겠는가? 상량이 무너지고, 종이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이에 혁혁(赫赫)의 빛남을 알게 되었고, 돌오(突奧)의 빛살도 엿보게 되었다. 사방으로 세 벗(三友)를 택하였다. |
− | |출처= | + | |출처=임세권, 이우태,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한국국학진흥원, 2014, 18쪽. 온라인 참조: "[http://www.krpia.co.kr/product/main?plctId=PLCT00006041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누리미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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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7년([[신라 진성왕|진성왕]] 10) 긍양은 계룡산 [[보원정사|보원정사(普願精舍)]]에서 계를 받았다. | 897년([[신라 진성왕|진성왕]] 10) 긍양은 계룡산 [[보원정사|보원정사(普願精舍)]]에서 계를 받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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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마침내 건령 4년(897, 진성왕 10) 계룡산 보원정사(普願精舍)에서 지범(持犯)을 품은 연후에 하안거(夏安居: 坐雨)를 할 때에는 마음을 굳히고, 구름 위에 누운듯 생각을 간절히 하여 계율(戒珠)를 지키는 데에는 비길 사람이 없었고, 지혜의 칼을 가는 데에는 더 굳은 것이 없었다. |
− | |출처= | + | |출처=임세권, 이우태,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한국국학진흥원, 2014, 19쪽. 온라인 참조: "[http://www.krpia.co.kr/product/main?plctId=PLCT00006041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누리미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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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긍양은 서혈원(西穴院)으로 가서 [[양부|양부선사(楊孚禪師)]] 밑에서 수행하였다. | 또한 긍양은 서혈원(西穴院)으로 가서 [[양부|양부선사(楊孚禪師)]] 밑에서 수행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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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 + | |출처=임세권, 이우태,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한국국학진흥원, 2014, 19쪽. 온라인 참조: "[http://www.krpia.co.kr/product/main?plctId=PLCT00006041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누리미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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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3일 (일) 17:23 판
긍양(兢讓) | |
대표명칭 | 긍양 |
---|---|
한자 | 兢讓 |
생몰년 | 878(헌강왕 4)-956(광종 7) |
시호 | 정진(靜眞) |
탑호 | 원오(圓悟) |
이칭 | 백암화상(伯巖和尙), 봉종대사(奉宗大師), 증공대사(證空大師) |
성씨 | 왕씨(王氏) |
출신지 | 충청남도 공주 |
승탑 |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 |
승탑비 |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비 |
목차
정의
신라 말 고려 초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정진대사 긍양靜眞大師 兢讓)은 878년(헌강왕 4)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왕씨(王氏)로 할아버지는 숙장(淑長), 아버지는 양길(亮吉)이고, 어머니는 김씨(金氏)이다. 긍양의 고조와 증조부 때부터 군읍(郡邑)의 토호였으므로, 집집마다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1]
대사의 휘는 긍양(兢讓)이요 속성은 왕씨로 공주 사람이다. 할아버지는 숙장(淑長)이고, 아버지는 양길(亮吉)인데, 두 분 모두 인의(仁義)에 힘써 자신을 이루려는 마음을 지녔으며, 덕을 쌓고 공을 넉넉히 하여 자손에 넘겨주는 업(業)을 귀하게 하였다. 힘을 다해 관직에 복무했고, 서리와 눈을 품은듯 마음을 깨끗이 하였다.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어른이라 칭하였고, 이웃 마을에서는 명예를 잘 지켜 현명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고조·증조는 모두 군읍(郡邑)의 호부(豪富)로서 그 집안(戶)을 알기 어렵지 않으므로 싣지 않는다. 어머니는 김씨이다. 여자의 공에 대해서는 상대할 사람이 없을 정도이고, 아내의 도리에 대해서도 규범이 있었다. 머리카락을 자르는 심정으로 순순히 정을 지키려 하였고, 학문을 중도에 그만두는 것을 경계하여 절개에 힘썼다. 스님과 부처님께 공경을 다하였고, 시부모 섬기기에 예를 다하였다. | ||
출처: 임세권, 이우태,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한국국학진흥원, 2014, 18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
탄생설화
긍양의 어머니는 어느 날 밤 별이 흘러 와서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을 하였다.[2]
꿈에 유성이 품속에 들어 왔는데 크기가 항아리만했고, 색은 누런 윤택이 났다. 이로 인하여 임신하였다. 이 때문에 냄새난다는 음식을 끊고 삼가며 보호하기에 힘써 태교를 끊지 않았는데 기간이 좀 지나 태어났다. | ||
출처: 임세권, 이우태,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한국국학진흥원, 2014, 18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
유년기
긍양은 타고난 모습이 특이하였으며 어려서부터 나이든 사람과 같이 점잖았다.[3]
대사는 타고난 성품이 특이하였고, 마음과 얼굴 빛이 아름답고 기묘했다. 아이일 때부터 일곱살 무렵에 이를 때까지 어린애 같은 행동이 없어서 마치 나이든 것 같았다. 앉을 때에는 반드시 가부좌를 하고 행할 때는 모름지기 합장을 하였다. 모래를 모아 담을 쌓으면 불탑과 비슷한 것을 만들었고, 나뭇잎으 모으고 꽃을 따면 공양하는 공구(供具)와 비슷한 것을 만들어 진열하였다. 공부할 나이에 이르러서는 날마다 경전을 끼고 있었따. 집에서는 시와 예를 배웠고, 학교 강당에 가서는 강론을 들었는데, 가죽 끈이 세 번 끊어질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여 (漢代의) 구류가(九流家)보다 더하다고 할 수 있었다. | ||
출처: 임세권, 이우태,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한국국학진흥원, 2014, 18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
출가수행
긍양은 공주 남혈원(南穴院)으로 가서 여해선사(如解禪師)의 제자가 되어 출가하였다.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간절히 아뢰어 출가(出家)하여 입도할 것을 진실로 청하였다. (그리하여) 공주 서혈원(西穴院) 여해선사(如解禪師)에게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몸을 머물렀다. 뜻은 아침에 듣는 데 두었고 배움은 날마다 넘치기를 기대하였다. 실로 배전의 공을 들었으니 누가 감이 더디다 하겠는가? 상량이 무너지고, 종이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이에 혁혁(赫赫)의 빛남을 알게 되었고, 돌오(突奧)의 빛살도 엿보게 되었다. 사방으로 세 벗(三友)를 택하였다. | ||
출처: 임세권, 이우태,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한국국학진흥원, 2014, 18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
897년(진성왕 10) 긍양은 계룡산 보원정사(普願精舍)에서 계를 받았다.
마침내 건령 4년(897, 진성왕 10) 계룡산 보원정사(普願精舍)에서 지범(持犯)을 품은 연후에 하안거(夏安居: 坐雨)를 할 때에는 마음을 굳히고, 구름 위에 누운듯 생각을 간절히 하여 계율(戒珠)를 지키는 데에는 비길 사람이 없었고, 지혜의 칼을 가는 데에는 더 굳은 것이 없었다. | ||
출처: 임세권, 이우태,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한국국학진흥원, 2014, 19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
또한 긍양은 서혈원(西穴院)으로 가서 양부선사(楊孚禪師) 밑에서 수행하였다.
법을 구하는 데 부지런하였고, 머물러 있지 않고 사방을 돌아다녔다. 마침내 서혈원의 양부선사를 찾아갔다. 선사는 반갑게 맞이하고 적심으로 접대하였다. 거문고와 북으로 말미암아 공자의 문하에서 열 명의 능한 사람의 이름도 알았고, 세 가지 예의를 펼칠 때도 있었다. 마음에 남기는 데 게을리하지 않았고, 봉양하는 데 오직 힘썼다. | ||
출처: 임세권, 이우태,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한국국학진흥원, 2014, 19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
구법유학
긍양은 899년(효공왕 3) 당나라에 건너가 석상경제(石霜慶諸)의 제자인 곡산도연(谷山道緣)을 친견하였다. 긍양은 도연에게 경제의 가르침에 대해 물었는데, "대대로 일찍이 계승되지 않았다."는 도연의 대답에 크게 깨달았다. 그 뒤,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서 오대산으로 가는 도중 관음사에 머물렀는데, 갑자기 얼굴에 독창이 생겨 치료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홀로 열반당(涅槃堂)에 머물면서 일심으로 관음염불을 하는데, 한 노승이 나타나 숙원을 가진 사람의 원한 갚음이라 하면서 정성껏 씻어주었는데 그 후 독창이 깨끗이 나았다. 그 뒤, 오대산·운개산(雲盖山)·동산(洞山) 등지를 순례한 뒤 924년(경애왕 1) 전주(全州) 희안현(喜安縣, 전북 부안군) 포구로 귀국하였다.[4]
활동
927년(경순왕 1)에는 스승인 양부선사(楊孚禪師)가 주석하였던 강주(康州) 백엄사(伯嚴寺)에 머물렀다.[5]
경애왕은 긍양의 덕을 찬탄하여 서신과 함께 '봉종대사(奉宗大師)'라는 호를 내려주었다.[6]
긍양은 935년(경순왕 9) 희양산으로 가서 봉암사를 중창하였고, 이곳에 머물면서 선실(禪室)을 구축하고 제자들을 가르쳐 희양산문을 확립하였다.[7]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자, 긍양은 스스로 개경에 가서 태조를 만났다. 이때 태조는 긍양과 더불어 대장경(大藏經)을 사경하여 개경과 서경에 나누어 안치하는 일에 대해 논의하였다. 정종에게 마납가사(磨衲袈裟) 1벌과 사경한 의희본(義熙本) 『화엄경(華嚴經)』 8질을 받기도 하였다.[8]
951년(광종 2) 봄 긍양은 왕의 친서를 받고 개경에 갔다. 광종은 긍양을 영접하여 호국제석원(護國帝釋院)에 모신 뒤 특별히 공양을 올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정도(政道)에 대해 물었고, 그 해 4월에는 사나선원(舍那禪院)으로 이주하게 하고 '증공대사(證空大師)'라는 호를 올렸다.[9]
입적
긍양은 953년(광종 4) 가을 봉암사로 돌아갔고, 3년 후인 956년(광종 7) 79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출처: |
광종은 정진대사(靜眞大師)라는 시호와 원오지탑(圓悟之塔)이라는 탑명을 하사하였으며, 영정 1위를 제작하고 공양을 베풀었다. 탑비는 965년(광종 16)에 세워졌다.
출처: |
희양산문 개창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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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비 | 긍양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 | 긍양 |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 |
여해 | 긍양 | A는 B의 스승이다 | |
긍양 | 보원정사 | A는 B에서 계를 받았다 | |
양부 | 긍양 | A는 B의 스승이다 | |
도연 | 긍양 | A는 B의 스승이다 | |
긍양 | 합천 백엄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긍양 | 신라 경애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문경 봉암사 | 긍양 | A는 B가 중건하였다 | |
희양산문 | 긍양 | A는 B가 중창하였다 | |
긍양 | 고려 태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긍양 | 고려 정종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긍양 | 고려 광종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긍양 | 개성 사나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긍양 | 문경 봉암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긍양 | 문경 봉암사 | A는 B에서 입적하였다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878년 | 긍양 출생 |
897년 | 긍양은 계룡산 보원정사에서 계를 받았다. |
899년 | 긍양은 당나라로 건너갔다. |
924년 | 긍양은 당나라에서 귀국하였다. |
927년 | 긍양은 합천 백엄사에 주석하였다. |
935년 | 긍양은 문경 봉암사를 중창하고, 희양산문을 확립하였다. |
951년 봄 | 긍양은 고려 광종의 친서를 받고 개경에 갔다. |
951년 4월 | 긍양은 개성 사나사에 주석하였으며, 고려 광종으로 부터 '증공대사(證空大師)'라는 호를 받았다. |
953년 | 긍양은 문경 봉암사로 돌아가 주석하였다. |
956년 | 긍양 입적 |
965년 | 긍양의 탑비가 건립되었다.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긍양", 디지털 삼국유사 사전 박물지 시범개발,
『문화원형라이브러리』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 ↑ "긍양", 디지털 삼국유사 사전 박물지 시범개발,
『문화원형라이브러리』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 ↑ "긍양", 디지털 삼국유사 사전 박물지 시범개발,
『문화원형라이브러리』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 ↑ 김위석, "긍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긍양", 디지털 삼국유사 사전 박물지 시범개발,
『문화원형라이브러리』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 ↑ 김위석, "긍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긍양", 디지털 삼국유사 사전 박물지 시범개발,
『문화원형라이브러리』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 ↑ "긍양", 디지털 삼국유사 사전 박물지 시범개발,
『문화원형라이브러리』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 ↑ "긍양", 디지털 삼국유사 사전 박물지 시범개발,
『문화원형라이브러리』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참고문헌
- 임세권, 『한국금석문집성 2: 고려4 비문4』, 한국국학진흥원, 2014.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0",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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