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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 겨우 20살 때이웃에 사는 친한 벗이 사망하므로, 슬픔에 잠겨 부로(父老)들에게 묻기를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하니, 모두 말하되 “어느 곳으로 가는지 알 수 없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가슴이 답답하여 슬픔만 더하였다. 그리하여 그 길로 공덕산(功德山) 대승사(大乘寺) 묘적암(妙寂庵)으로 달려가 요연선사(了然禪師)에게 몸을 던져 삭발하고 사미계를 받았다. 요연선사가 이르되 “너는 무슨 목적으로 출가(出家)하였는가”라 하니, 대답하기를 “삼계(三界)를 초월하여 생사(生死)를 해탈(解脫)하고, 중생을 이익(利益)케 하고자 함입니다”라 하고 또 스님의 지도를 청하였다. 스님이 말하기를 “네가 여기에 온 정체가 무슨 물건인가”라 하니, 대답하기를 “능히 말하고 능히 듣고 능히 여기까지 찾아온 바로 그 놈입니다. 다만 닦아 나아갈 방법을 알지 못하나이다”라 하였다. 요연(了然)스님이 말씀하되 “나도 너와 같아서 아직 알지 못하니, 다른 명안종사(明眼宗師)를 찾아가서 묻고 배우라”고 하였다. | | 나이 겨우 20살 때이웃에 사는 친한 벗이 사망하므로, 슬픔에 잠겨 부로(父老)들에게 묻기를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하니, 모두 말하되 “어느 곳으로 가는지 알 수 없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가슴이 답답하여 슬픔만 더하였다. 그리하여 그 길로 공덕산(功德山) 대승사(大乘寺) 묘적암(妙寂庵)으로 달려가 요연선사(了然禪師)에게 몸을 던져 삭발하고 사미계를 받았다. 요연선사가 이르되 “너는 무슨 목적으로 출가(出家)하였는가”라 하니, 대답하기를 “삼계(三界)를 초월하여 생사(生死)를 해탈(解脫)하고, 중생을 이익(利益)케 하고자 함입니다”라 하고 또 스님의 지도를 청하였다. 스님이 말하기를 “네가 여기에 온 정체가 무슨 물건인가”라 하니, 대답하기를 “능히 말하고 능히 듣고 능히 여기까지 찾아온 바로 그 놈입니다. 다만 닦아 나아갈 방법을 알지 못하나이다”라 하였다. 요연(了然)스님이 말씀하되 “나도 너와 같아서 아직 알지 못하니, 다른 명안종사(明眼宗師)를 찾아가서 묻고 배우라”고 하였다. |
2017년 8월 19일 (토) 02:44 판
혜근(惠勤) | |
대표명칭 | 혜근 |
---|---|
한자 | 惠勤 |
생몰년 | 1320년(충숙왕 7)-1376년(우왕 2) |
시호 | 선각(禪覺) |
호 | 나옹(懶翁), 강월헌(江月軒) |
성씨 | 아씨(牙氏) |
속명 | 아원혜(牙元惠) |
출신지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
승탑 | 양주 회암사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 |
승탑비 |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
목차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선각왕사 혜근은 1320년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寧海)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아씨(牙氏)이고 이름은 원혜(元惠)이다. 아버지는 아서구(牙瑞俱)로 벼슬은 선관령(膳官令)을 지냈다. 어머니는 정씨(鄭氏)이고, 금색(金色)새가 오색(五色)이 찬란한 알을 떨어뜨려 가슴으로 들어오는 태몽(胎夢)을 꾸고 혜근을 낳았다고 한다.
출가수행
혜근은 20세에 이웃 동무가 죽는 것을 보고 여러 어른에게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으나, 모두들 모른다 하였다. 이에 매우 슬픔 심정으로 공덕산 묘적암(지금의 문경 대승사)의 요연선사(了然禪師)에게 출가하였다고 한다. 요연선사는 깨닫지 못하여 혜근을 지도할 수 없었다. [1] 이색의『 목은집』에는 "혜근이 1344년(지정 갑신년)에 회암사에 이르러 주야로 홀로 좌선하다가 홀연히 깨달음을 얻고는 중국으로 가서 스승을 찾으리라 결심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혜근의 깨달음은 양주 회암사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2]
구법유학
1347년(충목왕 3) 원나라 연경(燕京) 법원사(法源寺)에서 인도승 지공의 지도를 받으며 4년 동안 지내다가, 1350년(충정왕 2)에 평강부(平江府) 휴휴암(休休庵)에서 한철을 보내고, 다시 자선사(慈禪寺)의 평산처림을 참견(參見)하여 그의 법을 이었다.[3]
원 순제(順帝)는 그를 연경의 광제선사(廣濟禪寺) 주지로 임명하였고, 1356년 10월 15일에는 개당법회(開堂法會)를 가졌다. 순제의 만류를 무릅쓰고 주지직을 내놓은 뒤 다시 지공을 찾아갔다가 1358년(공민왕 7)에 귀국하였다.[4]
활동
공민왕과 태후의 청으로 잠시 신광사(神光寺)에 머무르면서 설법과 참선으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5] 혜근의 신광사 주석은 공민왕의 귀의와 함께 이루어진 파격적인 인사였다. 승과를 보지 않고 원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40대의 젊은 승려에게 신광사와 같은 대찰의 주지를 맡겼기 때문이다. [6]혜근이 주석한 신광사는 1335년경부터 원 순제의 원찰이 되어 순제가 직접 후원하던 사찰이었다. [7]
공부선(功夫選)은 1370년(공민왕 19) 9월 16-17일 양일간 광명사에서 개최되었다. 공민왕은 주맹(主盟)으로 혜근을 임명했다. 16일 공민왕은 광명사에 행차하여 공부선을 참관했다. 이 공부선에는 선종과 교종으로 크게 구분되는 고려불교 교단을 구성하는 모든 승려들이 참여했다. 유일하게 공부선을 통과한 혼수는 당시 50세의 중년이었다. [8]
입적
1374년(공민왕 24) 봄 혜근은 회암사 중수를 시작하지만 9월 공민왕이 급작스럽게 세상을 뜨고, 우왕이 즉위했다. 우왕은 즉위 후 혜근을 왕사로 다시 임명했다. 우왕대 혜근은 공민왕을 천도하는 불사를 주관하기 위해 개경에 머문 것 외 다른 활동은 보이지 않아 회암사 중수에 전념했음을 알 수 있다. 1376년(우왕 2) 4월 15일 회암사에서 낙성식이 거행되었으나, 이 낙성식으로 인해 혜근은 대관(臺官)의 탄핵을 받아 밀양 영원사(塋源寺)로 추방되었고, 밀양으로 가던 도중인 1376년(우왕 2) 5월 15일에 여주 신륵사에서 갑자기 입적하였다. 나이 56세, 법랍 37세였다. [9]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 혜근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 양주 회암사지 | A는 B에 있다 | |
양주 회암사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 | 혜근 |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 1381년 |
양주 회암사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 | 양주 회암사지 | A는 B에 있다 |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 혜근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1379년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 여주 신륵사 | A는 B에 있다 |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 혜근 |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 1379년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 여주 신륵사 | A는 B에 있다 | |
원주 영전사지 보제존자탑 | 혜근 |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 1388년 |
원주 영전사지 보제존자탑 | 원주 영전사 | A는 B에 있었다 | |
원주 영전사지 보제존자탑 | 국립중앙박물관 | A는 B에 있다 | |
혜근 | 개성 광명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1370년 |
혜근 | 양주 회암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1344년, 1370년 |
혜근 | 여주 신륵사 | A는 B에서 수행하였다 | 1372년 |
혜근 | 문경 대승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1339년 |
혜근 | 해주 신광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1361년 |
혜근 | 춘천 청평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1367년 |
지공 | 혜근 | A는 B의 스승이다 | |
혜근 | 원 순제 | A는 B와 관련있다 | |
혜근 | 요연 | A는 B의 스승이다 | |
혜근 | 나옹화상어록 | A는 B를 저술하였다 | |
혜근 | 나옹화상가송 | A는 B를 저술하였다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 empiricalalchemist, 윤홍식의 큰스님 시리즈 #01 - 나옹화상 혜근, Youtube, 게시일: 2013. 3. 3.
주석
- ↑ 김방룡, 「나옹혜근의 원나라 유학과 귀국 후 활동」, 『회암사지박물관 연구총서Ⅳ - 회암사와 불교사』, 회암사지박물관, 2016,142쪽.
- ↑ 김방룡, 「나옹혜근의 원나라 유학과 귀국 후 활동」, 『회암사지박물관 연구총서Ⅳ - 회암사와 불교사』, 회암사지박물관, 2016,145쪽.
- ↑ 김위석, "혜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위석, "혜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위석, "혜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강호선, 『高麗末 懶翁慧勤 硏究』, 서울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1, 126쪽.
- ↑ 강호선, 『高麗末 懶翁慧勤 硏究』, 서울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1, 123쪽.
- ↑ 강호선, 『高麗末 懶翁慧勤 硏究』, 서울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1, 138-139쪽.
- ↑ 강호선, 『高麗末 懶翁慧勤 硏究』, 서울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1, 184쪽
참고문헌
- 강호선, 『高麗末 懶翁慧勤 硏究』, 서울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1.
- 김방룡, 「나옹혜근의 원나라 유학과 귀국 후 활동」, 『회암사지박물관 연구총서Ⅳ - 회암사와 불교사』, 회암사지박물관, 2016.
- 김위석, "혜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김효탄, 『고려말 나옹의 선사상연구』, 민족사, 1999.
- 염중섭, 『懶翁의 禪思想 硏究 : 指空의 영향과 功夫選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4.
- 이철헌, 『懶翁 惠勤의 硏究』, 동국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7.
- 황인규, 「나옹혜근의 불교계 행적과 유물·유적」,『대각사상』11, 대각사상연구원,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