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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유구는 | + | 서유구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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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7일 (목) 17:27 판
서유구(徐有榘) | |
대표명칭 | 서유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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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徐有榘 |
생몰년 | 1764-1845 |
본관 | 대구(大邱) |
호 | 풍석(楓石) |
자 | 준평(準平) |
시대 | 조선 |
국적 | 조선 |
대표저서 | 임원경제지, 난호어목지, 누판고 |
대표직함 | 이조판서, 우참찬, 대제학 |
부 | 서호수(徐浩修) |
모 | 김덕균(金德均)의 딸 |
성격 | 문신 |
정의
서유구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내용
생애
본관은 대구(大邱). 자는 준평(準平), 호는 풍석(楓石). 판서 서종옥(徐宗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제학 서명응(徐命膺)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서호수(徐浩修)이다. 어머니는 김덕균(金德均)의 딸이다. 당숙(堂叔) 서철수(徐澈修)에게 입양되었다.[1] 서유구는 여산 송씨 송익상(宋翼庠)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서우보(徐宇輔)이고 윤대동(尹大東)의 딸과 결혼하였다. 딸은 이광응(李光膺)과 결혼하였다. [2]
교유관계
서유구는 박지원(朴趾源), 이덕무(李德懋), 성대중(成大中),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남공철(南公轍) 등 북학파들과 어린 시절부터 돈독한 교분을 나누었고, 이들을 통해 새로운 학문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특히 박지원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아, 지은 글을 그에게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이런 연유로 박지원이 정조로부터 ‘문체반정’에 의해 질책을 받던 시절에도 박지원을 추종하였고, 그에 대해 비판적인 김조순과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은퇴한 이후에는 시골에 머물면서, 남공철, 성해응(成海應), 홍석주(洪奭周), 홍길주, 정약용(丁若鏞) 등과 계속 교유하였다. 그리고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朴珪壽), 윤정현(尹定鉉), 이유원(李裕元), 김영작(金永爵) 등 후배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3]
관직활동
- 초계문신으로 선발되다
서유구는 1786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1790년 27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면서 관료생활을 시작하였다. 초계문신에 선발되어 규장각에서 공부를 하였고, 1792년에는 규장각 대교에 임명되어 국가적 편찬 사업에 참여하였다. 그의 할아버지인 서명응이 규장각 제학에 임명되어, 규장각 설립 및 정비에 간여하였고, 그의 생부인 서호수 역시 규장각 직제학을 지냈고, 그의 작은아버지인 서형수도 규장각 초계문신에 선발되어 활동하는 등 그의 집안은 대대로 규장각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4]
- 평탄치 않은 관직활동
1806년, 작은아버지인 서형수가 김달순(金達淳)의 옥사에 연루되어 정계에서 축출되면서 그의 집안은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서유구는 이 일에 연좌되어 1806년에서 1824년까지 임진강(臨津江) 북쪽 장연(長淵)지역의 금화, 대호와 서울 주변 도봉산(道峰山) 아래 번계(樊溪)에 이어 남한강 유역의 두릉(斗陵)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다. 1824년 복직되어 강원도 회양부사에 임명되었다. 1827년에는 강화유수에 임명되어, 강화부의 폐단을 고치기 위한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1833년에는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고, 그가 전라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수행한 업무 내용을 기록한 책인『 완영일록(完營日錄)』을 저술하였다. 1836년에는 수원유수에 임명되어 수원의 국영시범농장을 직접 관리하는 책임을 맡았다.이후 75세의 나이로 은퇴하였다. [5]
농학과 『임원경제지』편찬
- 저술 활동의 밑거름
서유구는 1791년 초계문신, 1796년부터는 규장각 각신의 자격으로『주역강의』, 『상서강의』, 『대학강의』, 『맹자강의』, 『좌전강의』, 『시경강의』,『삼경사서』, 『향례합편』 등의 편찬 작업에 간여하였다. 이 당시 서유구가 참여한 편찬 사업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전국에 소장된 책판 목록인 『 누판고(鏤板考)』를 작성한 것이다. 이처럼 서유구는 규장각의 교육과 편찬사업에 참여하면서 많은 서적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고, 이는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임원경제지』를 저술하는 데 밑바탕이 되었다.[6]
- 『임원경제지』 저술
『임원경제지』는 농업을 중심으로 복식, 천문, 건축, 음악, 미술, 식생활 등 다양한 학문이 수록된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이 책은 달성서씨 가문의 농업에 관한 관심과 서유구가 규장각에서 근무할 때 볼 수 있었던 수많은 책, 그리고 그의 다양한 지방관 역임 경험이 어우러져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18~19세기 활발한 인적교류와 각종 서적들의 대량 출판으로 인한 새로운 지식과 정보의 광범위한 유통은 『임원경제지』가 저술될 수 있었던 시대적 배경이었다.
『임원경제지』는 113권 53책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서적이다. 서유구는 이 책을 단기간에 집중적인 저술 활동을 통해 편찬한 것이 아니라, 1806년부터 30여 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편찬하였다.[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