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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6일 (수) 12:38 판
무염(無染) | |
대표명칭 | 무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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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Muyeom |
한자 | 無染 |
생몰년 | 801(애장왕 2)-888(진성여왕 2) |
시호 | 대낭혜(大朗慧) |
호 | 무량(無量), 무주(無住) |
법명 | 무염(無染) |
탑호 | 백월보광(白月葆光) |
성씨 | 김씨(金氏) |
승탑비 |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
목차
정의
신라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낭혜화상 무염(朗慧和尙 無染)은 태종무열왕의 8대손으로 800년(애장왕 원년)에 태어났다.
(대사의) 법호(法號)는 무염(無染)으로 달마대사의 10대 법손(法孫)이 된다. 속성(俗姓)은 김씨(金氏)로 태종무열왕이 8대조이시다. 할아버지는 주천(周川)으로 골품(骨品)은 진골이고 한찬(韓粲)을 지냈으며, 고조부와 증조부는 모두 조정에서는 재상, 나가서는 장수를 지내 집집에 널리 알려졌다. 아버지는 범청(範淸)으로 골품이 진골에서 한 등급 떨어져서 득난(得難)이 되었다. | ||
출처: 최연식,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금석문세부정보, |
탄생설화
어머니 화씨(華氏)가 꿈에 긴 팔을 가진 천인(天人)이 연꽃을 내려주는 것을 보고서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얼마 후에는 다시 꿈 속에 서역의 도인(道人)이 나타나서 스스로 법장(法藏)이라고 하면서 10계(戒)를 주면서 그것으로 태교(胎敎)를 하게 하였다. 마침내 1년이 지나서 (대사가) 태어났다. | ||
출처: 최연식,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금석문세부정보, |
유년기
대사는 아해(阿孩) [우리말로 어린아이를 말하는 것이니 중국말과 다르지 않다] 적에 걷거나 앉을 때 반드시 합장을 하고 가부좌를 하였으며, 여러 아이들과 놀면서 그림을 그리거나 모래로 무엇을 만들 때에는 반드시 불상이나 탑을 본떴다. 하루도 부모님의 곁을 떠나지 않다가 아홉 살 때에 처음으로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눈으로 본 것은 반드시 입으로 암송할 수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해동의 신동이라고 일컬었다. | ||
출처: 최연식,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금석문세부정보, |
출가수행
13세에 오색석사(五色石寺)로 출가하였다.
열두 살을 넘기고 나서(13세)는 여러 학문을 비루하게 여기고 불도(佛道)에 들어가려는 뜻을 갖게 되었다. 먼저 어머니에게 그 뜻을 이야기하자 어머니는 이전의 꿈을 생각하고는 울면서 “예[우리말로 허락이다]”라고 하였다. 뒤에 아버지에게 말씀드리자 아버지는 자신이 늦게서야 깨달은 것을 후회하였으므로 기뻐하며 “잘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서 입으로는 경전을 부지런히 읽고,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데 힘을 다하였다. | ||
출처: 최연식,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금석문세부정보, |
오색석사에서 법성선사(法性禪師)에게 능가선(楞伽禪)을 배우다가
이 절에 법성선사(法性禪師)라고 하는 분이 계셨는데 일찍이 중국에 가서 능가선(楞伽禪)을 배웠었다. 대사는 이분에게 수년간 배웠는데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열심이었으므로 법성선사가 말하기를 “빠른 발로 달린다면 뒤에 출발하여도 먼저 도착한다는 것을 나는 너에게서 직접 보았다. 나는 아는 것이 적어서 그대에게 더 이상 가르쳐 줄 것이 없다. 너와 같은 사람은 중국에 유학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이에 대사는 “알았습니다” 하였다. | ||
출처: 최연식,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금석문세부정보, |
부석사(浮石寺)에서 석징대사(釋澄大師)로부터 화엄을 공부하였다.
곧 그곳을 떠나 부석산(浮石山)의 석징대덕(釋澄大德)에게 화엄(華嚴)을 배웠는데, 하루에 서른 사람 몫의 공부를 하니 푸른 색과 붉은 색이 남초(藍草)와 천초(茜草)의 원래 색을 무색케 하는 것 같았다. 대사는 조그만 구멍에 담긴 물에서는 잔이 뜰 수 없듯, 여건이 조성되지 않은 곳에서는 자신의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없음을 생각하고서 “동쪽을 바라보기만 하다가는 서쪽의 담(중국)은 보지 못할 것이다. 깨달음의 세계가 멀지 않을 터인데 어찌 살던 곳만 고집하겠는가”라고 생각하고 선뚯 산에서 나와 바다로 나아가 중국으로 건너갈 기회를 엿보았다. | ||
출처: 최연식,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금석문세부정보, |
구법유학
821년(헌강왕 13)에 사신으로 가는 왕자 흔(昕)의 도움으로 중국에 유학하였다.
때마침 나라의 사신이 天子가 하사한 부절(符節)을 가지고 가서 천자에 조회할 일이 있었으므로 그 배에 의지하여 중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배가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자 바람과 파도가 갑자기 거칠어져서 큰 배가 깨어지니 사람들이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대사는 벗 도량(道亮)과 함께 한장 널판지에 걸터앉아 바람에 맡긴 채 떠다니게 되었다. 밤낮없이 반달 가량을 떠다닌 후에 검산도(劒山島 : 黑山島)에 표착(漂着)하게 되었다. 무릎 걸음으로 물가에 도착하여 한참이나 실의에 잠겨있다가 말하기를 “물고기 배 속에서도 간신히 몸을 건졌으니 용의 턱밑에도 손을 넣어 (바라는 구슬을) 아마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마음은 구르는 돌이 아니니 물러남이 없을 것이다”고 하였다. 장경(長慶 : 821~824) 초에 조정사(朝正使)로 가게된 왕자 흔(昕)이 당은포(唐恩浦)에 배를 대었기에 태워줄 것을 부탁하니 그러라고 하였다. 마침내 지부산(之罘山) 기슭에 도착해서는 전에는 어려웠던 일이 이제 쉽게 됨을 생각하고서 해약(海若 : 바다의 신)에게 공손히 절하고서 “큰 파도를 자제하고, 바람의 마군과 잘 싸우셨습니다”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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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연식,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금석문세부정보, |
처음에는 화엄을 공부하다가 후에 마조도일의 문하인 마곡(麻谷) 보철화상(寶徹和尙)에게서 심인을 얻게 되었다.
그곳을 떠나 마곡(麻谷) 보철화상(寶徹和尙)을 찾아가 모시면서 힘든 일을 하는 것을 가리지 않고, 남이 하기 어려워 하는 것을 쉽게 해내었다. 이에 여러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선문(禪門)에 있어서 유검루(庾黔婁)와 같은 남다른 행실을 하는 자”라고 말하였다. 보철화상은 대사의 노력을 현명히 여기고서 하루는 불러서 말하기를 “전에 나의 스승인 마화상(馬和尙 : 馬祖道一)께서 나와 헤어질 때에 말씀하시길 ‘봄에 꽃이 많으면 가을에 열매가 적은 법이다. 보리수에 오르려고 하는 사람은 이것을 슬프게 여긴다. 지금 너에게 심인(心印)을 전하니 후일에 제자 가운데 재주가 뛰어나서 북돋아 줄만한 사람이 있으면 북돋아 주어서 끊어지지 않도록 하라’고 하시고 다시 말씀하시기를 ‘불법이 동쪽으로 전해간다는 말은 거의 예언에서 나온 말이니 해뜨는 곳(동쪽)에서 불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바탕이 거의 완숙해졌을 것이다. 만일 네가 동쪽 사람으로서 눈으로 말할 만한 사람을 얻어 잘 이끌어 지혜의 물이 바다 바깥(중국 바깥)에 까지 덮도록 한다면, 그 덕이 적지 않을 것이다’고 하셨다. 스승의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네가 왔으니 기쁘구나. 이제 심인(心印)을 전하여 동방에서 선종의 으뜸가는 사람이 되게 하니 가서 삼가 실행하거라. (그렇게 한다면) 나는 지금은 강서(江西) 마조(馬祖)의 수제자이고, 후세엔 해동(海東) 선문(禪門)의 할아버지가 될 터이니 스승에게 부끄럽지 않게 될 것이구나”고 하였다. | ||
출처: 최연식,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금석문세부정보, |
마곡(麻谷) 보철화상(寶徹和尙)이 입적한 후 여러 곳을 다니며 수행을 계속하다
그곳에 머무른 지 얼마 안되어 보철화상이 세상을 떠나 묵건(墨巾)을 머리에 쓰고 이내 말하기를 “큰 배가 이미 떠나버렸는데 작은 배가 어디에 묶여 있을 것인가”라 하고 이때부터 각지를 유랑하였는데 바람처럼 하여 그 기세를 막을 수 없고, 뜻을 빼앗을 수 없었다. 분수(汾水)를 건너고 곽산(崞山)을 오르기까지 오래된 (불교의) 자취는 반드시 찾아가고, 참된 승려는 반드시 만나 보았다. ...(중략)... (중국에서의) 30여 년간의 행적은 이와 같았다. | ||
출처: 최연식,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금석문세부정보, |
귀국 및 활동
당 무종의 폐불(회창법난, 845)로 인하여 신라에 귀국하였다.
회창(會昌) 5년(845)에 귀국하였는데 이것은 황제가 (외국 승려들을 귀국하도록) 명령하였기 때문이다. 나라 사람들이 서로 즐거워하며 말하기를 “여러 성(城)과 바꿀 수 있는 귀한 보배가 다시 돌아왔으니 이것은 하늘이 해주신 일로 땅에는 복되는 것이다”고 하였다. 이때부터 배움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이 마치 벼와 삼같이 빽빽하였다. 서울에 들어와 어머니를 찾아뵈니 (어머니는) 크게 즐거워하면서 “돌이켜 보니 전에 내가 꾼 꿈이 우담화가 한 번 드러난 것이 아니겠느냐. 바라건대 내세를 제도하라. 나는 다시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에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고 말하였다. | ||
출처: 최연식,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금석문세부정보, |
귀국 후 왕자 흔(昕)의 요청에 의해 능주현(지금의 공주)의 사찰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때 마침 왕자 흔(昕)은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며 산중(山中)의 재상(宰相)으로 불렸는데 우연히 바라는 바가 합치되었다. (昕이) 말하기를 “스님과 나는 함께 용수(龍樹) 을찬(乙粲)을 조상으로 하고 있으니, 스님은 안팎으로 모두 용수(龍樹)의 자손입니다. 참으로 놀라와 감히 미칠 바가 못됩니다. 그러나 바다 밖에서 함께 했던 일이 있으니 옛적의 인연이 결코 얕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웅천주(熊川州) 서남쪽 모퉁이에 절이 하나 있는데 이것은 나의 조상인 임해공(臨海公) [휘(諱)는 인문(仁問)이고, 당나라가 예맥(濊貊 : 실은 高句麗를 말함)을 정벌할 때에 공이 있어서 임해공(臨海公)으로 봉해졌다]께서 봉토로 받은 곳입니다. 그 사이 커다란 불이 일어나 사찰이 반쯤은 재가 되어버렸으니, 자비롭고 현명하신 분이 아니라면 누가 이것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겠습니까. 부디 이 부족한 사람을 위하여 머물러 주시기 바랍니다”고 하였다. 대사는 대답하기를 “인연이 있다면 머물러야겠지요”라고 하였다.
대중(大中 : 847~859) 초에 그곳으로 가서 머물기 시작하면서 말끔히 단장하였던 바, 얼마 되지 않아 도(道)가 크게 행하여지고 절은 크게 번성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사방의 먼 곳에서부터 도(道)를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천리 먼 길을 반걸음처럼 가깝게 여기고 찾아오니 그 수가 이루 셀 수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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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연식,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금석문세부정보, |
「성주사사적기()」에 의하면 이 사찰의 원래 이름은 오합사(烏合寺)였는데, 문성왕이 사찰의 이름을 성주(聖住)로 지어주고 대흥륜사에 편입시켰다.
문성대왕(文聖大王)께서는 대사가 행하는 일이 왕도(王道)를 행함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을 들으시고는 매우 기특하게 여기셔서 급히 어찰을 보내어 위로하였으며, 또한 대사가 산중(山中) 재상(宰相)에게 대답한 네 마디 말[有緣則住]을 중하게 여기셔서 사찰의 이름을 성주(聖住)로 바꾸고 대흥륜사(大興輪寺)에 편입시키도록 하셨다. | ||
출처: 최연식,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금석문세부정보, |
그후 경문왕이 즉위하자 왕성에 초치되어 머물다가 상주 심묘사에 거주할 것을 허락받았다.
태사(太師)를 추증받으신 선대왕(先大王 : 景文王)께서 즉위하셔서도 (대사를) 공경하고 존중하심이 선조(先朝 : 憲安王) 때와 같아서 대우해 주는 것이 나날이 두터워졌다. 일을 시행할 때에는 반드시 사람을 보내어 물어본 후에 거행하였다. 함통(咸通) 12년(871) 가을에 (왕께서는) 대사에게 교서(敎書)를 급히 보내고 사람을 시켜 부르면서 말하기를 “산림(山林)을 어째서 가까이 하시면서 도성(都城)은 멀리하십니까?”라고 하였다. 대사는 제자들에게 “갑자기 진후(晉侯)가 백종(伯宗)을 부르듯하니 (산문에서 밖에 나오지 않았던) 혜원공(慧遠公)에게는 몹시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앞으로 도(道)를 행해지게 하려면 그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 부처께서 (불법이 전해지도록) 부촉(付囑)하신 바를 생각하니 내가 가야 되겠다”라고 말하고 즉시 서울에 도착하여 왕을 뵈었다. 선대왕께서는 면복(冕服) 차림으로 절을 하여 스승(王師)으로 삼았고, 왕비와 세자, 그리고 왕의 동생이신 상국(相國) [돌아가신 후에 왕으로 높이고 시호를 혜성대왕(惠成大王)이라고 하였다]과 여러 왕자, 왕손들이 빙 둘러싸고 한결같이 우러렀는데 마치 옛날 가람의 벽 그림에 서역의 여러 왕들이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모습과 비슷하였다. ...(중략)... 왕궁에서 나오자 재상들이 다투어 마중하니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도 할 수 없었고, 일반 백성들이 뒤쫓으며 따르니 떠나고자 하여도 그럴 수 없었다. 이때부터 나라 사람들이 모두 자신에게 귀한 보배(佛性)가 있음을 깨달아 이웃집의 보석을 탐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서 새장에 갇혀 있는 것 같은 생활을 괴롭게 여겨서 (서울을) 떠나고자 하였다. 임금께서는 억지로 만류할 수 없음을 알고 곧 교서(敎書)를 내려서 상주(尙州)의 심묘사(深妙寺)가 서울로부터 멀지 않으니 선종의 별관으로 삼아 머무르라고 하셨다. 대사는 거역할 수 없어 그곳에 가서 머물렀는데, 잠시 머물지라도 반드시 수리하였으니 곧 엄연한 절의 모습을 갖추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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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연식,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금석문세부정보, |
경문왕 사후 다시 성주사로 되돌아갔다가 헌강왕에 의하여 한번 더 왕성에 초치되었는데 이때 광종이라는 법호를 받게 되었다.
임금께서 대사를 인견함은 선조(先朝 : 景文王) 때의 예절과 같았는데 예에 덧붙여진 것으로서 손꼽을 만한 것으로는, 임금께서 직접 음식을 봉양한 것이 첫째이고, 손으로 향을 전하신 것이 둘째이며, 몸·입·뜻의 삼업(三業)으로 세 번이나 경의를 표하신 것이 셋째이며, 작미로(鵲尾爐)를 잡고 영생의 인연을 맺은 것이 넷째이며, 법칭(法稱)에 ‘광종(廣宗)’을 더하여 준 것이 다섯째이며, 다음날 어진 이들에게 대사가 머무는 절에 나아가 기러기처럼 열을 지어 인사드리도록 한 것이 여섯째이며, 나라 안의 시(詩)를 짓는 사람들에게 대사를 송별하는 시(詩)들을 짓게 하여서 재가제자(在家弟子)인 왕족 소판(蘇判) 억영(嶷榮)이 가장 먼저 시(詩)를 지으니 그것을 거두어서 두루마리로 만들고, 시독(侍讀)이며 한림관(翰林官)인 박옹(朴邕)이 거기에 인(引)을 붙여서 떠날 때에 준 것이 일곱째이며, 행차를 담당하는 관리들에게 정결한 방을 준비하도록 거듭 명하여 그곳에서 작별하신 것이 여덟째이다. | ||
출처: 최연식,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금석문세부정보, |
입적
좋은 일도 끝이 있고 한창 때도 끝나는 법이다. 정강대왕(定康大王)께서 즉위하셔서는 (景文王과 憲(獻)康王) 양조(兩朝)에서 은혜를 베푼 것을 본받아 행하고자 하여 승려와 속인으로 거듭 사신을 보내어 맞아 오게 하였으나 (대사는) 늙고 병들었다고 사양하였다. 태위대왕(太尉大王 : 眞聖王)께서는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온 나라를 덮었고 덕있는 사람을 존경하기를 높은 산을 바라보듯 하였다. 즉위하신 지 9개월만에 안부를 묻는 사자가 10번이나 다녀갔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는 허리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고 국의(國醫)를 보내어 치료하게 하였다. | ||
출처: 최연식,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금석문세부정보, |
당(唐)나라가 무공(武功)으로 (黃巢의) 난을 평정하고 연호를 ‘문덕(文德)’으로 고친 해(888년) 11월 17일 해가 질 무렵, 신라(新羅 : 海東)의 두 임금에 걸쳐서 국사(國師)를 지내셨던 선승(禪僧) (朗慧)화상(和尙)께서 목욕을 마치신 후 가부좌를 하신 채 돌아가셨다. 나라 안의 사람들이 슬퍼함이 마치 두 눈을 잃을 정도로 심하였는데 하물며 그 문하의 제자들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아아! 이 땅에 태어나신 지 89년이 되었고, 승복을 입으신 지는 65년이 되었다. 돌아가신지 3일이 지나도 자리에 단정히 앉은 그대로였고, 얼굴 모습도 살아 계신 것 같았다. 문인(門人)인 순예(詢乂) 등이 소리내어 울며 유체(遺體)를 받들어 선실(禪室)에 임시로 모셔 두었다. 임금께서 이 소식을 들으시고 크게 슬퍼하시며 사자(使者)를 보내어 글월로 조문(弔問)하시고, 곡식으로 부의(賻儀)하여 (葬禮의) 공양(供養)에 보탬으로써 죽은 분의 명복(冥福)을 빌고자 하셨다. | ||
출처: 최연식,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금석문세부정보, |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돌아가신 성주대사(聖住大師)는 참으로 부처님이 세상에 나신 것과 같은 분이셨다. 전에 나의 부왕(父王 : 景文王)과 헌강왕(憲(獻)康王) 모두 스승으로 섬기셔서, 오랫동안 나라에 이로움을 주셨다. 나도 왕이 되어서는 선왕들의 뜻을 이으려 하였으나, 하늘은 (그런 분을) 남겨주지 않았다. 이에 나의 마음이 더욱 애달프다. 생각컨데 큰 일을 한 사람에게는 큰 이름을 주어야 하므로 시호를 ‘대낭혜(大朗慧)’, 탑의 이름을 ‘백월보광(白月葆光)’이라고 하노라." | ||
출처: 최연식,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III,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금석문세부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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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위석, "무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5월 2일. - 임세권,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한국국학진흥원, 2014, 5-30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0: 신라6 비문6",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 누리미디어. - "무염",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무염 화상 비명", 고운집 제2권,
『한국고전종합DB』online , 한국고전번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