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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은 국방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며 산성 수축에 힘을 다하였다. 사명대사가 수축한 산성은 [[팔공산성|팔공산성(八公山城)]]·[[금오산성|금오산성(金烏山城)]]·[[용기산성|용기산성(龍起山城)]]·[[악견산성|악견산성(岳堅山城)]]·[[이숭산성|이숭산성(李崇山城)]]·[[부산성|부산성(釜山城)]] 및 [[남한산성]] 등이다. 그리고 군기 제조에도 힘을 기울여 [[합천 해인사|해인사]] 부근의 야로에서 활촉 등의 무기를 만들었고, 투항한 왜군 조총병을 비변사에 인도하여 화약 제조법과 조총 사용법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1594년([[조선 선조|선조]] 27) 의령에 주둔하였을 때 군량을 모으기 위하여 각 사찰의 전답에 봄보리를 심도록 하고, 산성 주위를 개간하여 [[정유재란]]이 끝날 때까지 군량미 4,000여 석을 갖추도록 하였다. [[조선 선조|선조]]는 사명대사의 공로를 크게 인정하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의 벼슬을 내렸다.<ref>손경희, "[http://gimcheon.grandculture.net/Contents?local=gimcheon&dataType=01&contents_id=GC03200875 사명대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김천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유정은 국방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며 산성 수축에 힘을 다하였다. 사명대사가 수축한 산성은 [[팔공산성|팔공산성(八公山城)]]·[[금오산성|금오산성(金烏山城)]]·[[용기산성|용기산성(龍起山城)]]·[[악견산성|악견산성(岳堅山城)]]·[[이숭산성|이숭산성(李崇山城)]]·[[부산성|부산성(釜山城)]] 및 [[남한산성]] 등이다. 그리고 군기 제조에도 힘을 기울여 [[합천 해인사|해인사]] 부근의 야로에서 활촉 등의 무기를 만들었고, 투항한 왜군 조총병을 비변사에 인도하여 화약 제조법과 조총 사용법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1594년([[조선 선조|선조]] 27) 의령에 주둔하였을 때 군량을 모으기 위하여 각 사찰의 전답에 봄보리를 심도록 하고, 산성 주위를 개간하여 [[정유재란]]이 끝날 때까지 군량미 4,000여 석을 갖추도록 하였다. [[조선 선조|선조]]는 사명대사의 공로를 크게 인정하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의 벼슬을 내렸다.<ref>손경희, "[http://gimcheon.grandculture.net/Contents?local=gimcheon&dataType=01&contents_id=GC03200875 사명대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김천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 | {{blockquote | ||
+ | |선조 임금께서 스님을궁중으로 초빙하여 자세하게 平生에 대한 일을 묻고는 下敎하여 이르되, “옛날 元나라의 劉秉忠과 明나라의 姚廣孝는 모두 山人인 스님의 신분이었으나, 나라에 큰 功勳을 세웠으므로 그 이름이 後世에까지 널리 流布되었습니다. 지금 國勢가 이와 같이 어려운 형편이니 스님이 만약 下山하여 머리를 기른다면 마땅히 百里의 食邑을 주는 한편 三軍의 統帥權을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으나, 스님은 감히 굳게 사양하고 물러났다. 宣祖가 무기고에 보관된鎧仗을 스님께 주었으므로 스님은 嶺南으로 돌아와서 남아 있는 倭賊을抄擊하고, 龍起·八公·金烏 등 여러 山城을 높고 굳게 쌓고, 그 山城의 要所마다 鎭地를 구축하고는 각각 藩鎭을 修飾하여 마친 후,印綏와 戰馬를 왕에게 되돌려 보내고 尺籍을 정리하여 備邊司에 보내고는 장서를 올려 한가롭게 수도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朝廷에서는 간곡히 만류하고 許諾하지 않았다. | ||
+ | 丁酉年 겨울 明나라에서 원군으로 온 提督 麻貴를 따라島山 陣地에 들어갔고, 戊戌年에는 또 提督 劉挺을 따라 曳橋 陣地에 들어가서 모두 큰 공을 세웠는데, 前後에 걸쳐 軍粮을 준비하여 먹인 것이 무려 4천여 섬이고, 武器와 갑옷의 수도 한량이 없었다. 임금께서 크게 嘉賞하게 여기시고 종2품 嘉善大夫로 特進하고 同知中樞府事를 제수하였다. | ||
+ | 辛丑年에 釜山城을 수축하고는內隱山으로 돌아갔으며, 癸卯年에는 王命을 받고 서울로 올라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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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5일 (화) 14:23 판
유정(惟政) | |
대표명칭 | 유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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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惟政 |
생몰년 | 1544년(중종 39)-1610년(광해군 2) |
시호 |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
호 | 사명당(四溟堂), 사명(四溟), 송운(松雲) |
법명 | 유정(惟政) |
자 | 이환(離幻) |
이칭 | 종봉(鍾峯) |
성씨 | 임씨 |
본관 | 풍천(豊川) |
속명 | 임응규(任應奎) |
출신지 | 경상남도 밀양 |
승탑 |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 |
승탑비 |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비 |
목차
정의
조선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유정은 1544년(중종 39) 10월 17일에 밀양(密陽)의 삼강동에서 임수성(任守成)과 그 부인인 달성서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정의 집안은 선대에 대대로 명성과 신망이 높았던 풍천의 이름난 집안이었다. 증조부 임효곤(任孝昆)은 문과에 급제하여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조부 임종원(任宗元)은 강계부사를 지냈는데, 증조부가 일찍이 대구의 수령을 지냈기 때문에 밀양에 살게 되었다. 그가 태어나던 날에는 어머니가 꿈에 흰 구름을 타고 황색 두건을 쓴 금인(金人)을 데리고 만 길이나 되는 높은 대에 올라가니 늙은 신선이 그 위에 걸터앉아 있다가 머리를 땅에 대고 절을 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1]
출가수행
유정은 7세를 전후하여 역사를 배우고, 13세 때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를 배웠다. 1558년(명종 13) 어머니가 죽고, 1559년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다.[2]
활동
임진왜란 이전
유정은 1561년 선과(禪科)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한 후 봉은사에 머물며 불교 경전을 부지런히 읽었다. 20여 세에 동녀배들로 갑회(甲會)를 조직하고 갑회문을 지어 나라와 백성을 위해 기도하며 건전한 승려 생활을 실행하자는 뜻을 다짐하였다. 한편 사암(思菴) 박순(朴淳),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자순(子順) 임제(林悌), 손곡(蓀谷) 이달(李達) 등 사대부 문인들과 시를 지으며 교유하였다. 한번은 하곡(荷谷) 허봉(許篈)과 중국의 문장가 한유(韓愈)의 글 한 편을 외우는 내기에 이겨 책 한 권을 받았다.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이 이야기를 듣고 "재주만 믿고 스스로 만족하면 학문에 발전은 없을 것"이라 하니, 이 말을 새겨듣고 공부에 열중하였으며,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에게서 많은 책을 빌려 읽는 이외에도 사자(四子, 공자·맹자·증자·자사)와 이백(李白), 두보(杜甫)의 시를 배워 일취월장하였다.[3]
유정은 1573년 직지사 주지로 있으면서 허응당(虛應堂) 보우(普雨)의 문집과 잡저의 간행에 발문을 쓰고 교정을 보았다. 1575년 선종(禪宗)의 수찰(首刹)인 봉은사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 서산대사의 문하로 들어갔다. 이로부터 3년 동안 수행을 거듭하였으며, 그 사이에 유정은 대동강 부벽루(浮碧樓)에 오르고, 고운 최치원의 족적을 따라 해인사를 비롯하여 사천 곤양성(昆陽城)과 하동 악양루(岳陽樓)를 유력하였다.[4]
1578년 서산대사의 문하를 떠나 금강산 보덕암(報德庵)으로 들어가 세번의 안거(安居)를 지내며 「동해사」 등 많은 시를 지었다. 1579년 『선가귀감』의 발문, 1580년 「부석사 안양루 중창기문」을 짓고 썼다. 이어 팔공산, 지리산, 청량산, 태백산 등을 순력하면서, 특히 태백산 운망사(雲望寺)의 이름을 고쳐 영은사(靈隱寺)라 한 것으로 보인다. 1583년 가을 관서로 가는 도중에 귀양살이하는 친한 벗 하곡을 생각하며 시를 지었다. 1586년 봄 옥천(沃天)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던 중 간밤의 비바람에 떨어진 낙화를 보고 문득 '무상(無常)'의 법을 깨달았다. 이에 제자들을 다 돌려보내고 홀로 선방에 들어가 가부좌하고 열흘 동안 선정에 들었다. 1589년에는 오대산 영감난야(靈鑑蘭若)에 머물면서 「월정사 법당의 서까래를 고치고 올린 글」을 지어 모금하며 사찰의 중수에 매달렸다. 이 가운데 정여립의 역모 사건에 모함을 받아 투옥되었으나 강릉 사림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5년 동안 계속된 공사는 단오절을 맞아 낙성식과 향조대회를 열어 완성을 고한 다음 유정은 금강산으로 들어갔다.[5]
임진왜란
승병으로서의 활동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유점사(楡岾寺)에 있으면서 인근 아홉 고을의 백성들을 구출하였다. 이때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서산대사의 격문을 받고 승병을 모아 순안 법흥사(法興寺)로 가서 서산대사와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 탈환의 전초 구실을 담당하였다. 1593년(선조 26) 1월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의 혈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해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蘆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선조는 사명대사의 전공을 포장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6]
가토 기요마사와의 회담
1594년 4월 명나라의 심유경(沈惟敬)과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협상과는 별도로 사명대사는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을 이간시키려는 계책의 주역을 맡게 되었다. 이때 처음으로 송운(松雲)이라는 법명으로 서생포 왜성을 찾아 가토 기요마사와 회담을 진행하였다.[7] 회담은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제1차 회담(1594년 4월 13~16일)·제2차 회담(1594년 7월 12~16일)·제3차 회담(1594년 12월 23일)·제4차 회담(1597년 3월 18일)에서, 강화5조약으로 제시된 '천자와 결혼할 것, 조선 4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전과 같이 교린 할 것, 왕자 1명을 일본에 영주하게 할 것, 조선의 대신·대관을 일본에 볼모로 보낼 것' 등을 하나하나 논리적인 담판으로 물리쳤다. 제2차 회담 후, 선조에게 회담의 전말과 적의 동정 및 대처 방안을 내용으로 하는 「토적보민사소(討賊保民事疏)」를 올렸으며, 1595년에는 「을미상소(乙未上疏)」를 올렸다.[8]
국방 강화 활동
유정은 국방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며 산성 수축에 힘을 다하였다. 사명대사가 수축한 산성은 팔공산성(八公山城)·금오산성(金烏山城)·용기산성(龍起山城)·악견산성(岳堅山城)·이숭산성(李崇山城)·부산성(釜山城) 및 남한산성 등이다. 그리고 군기 제조에도 힘을 기울여 해인사 부근의 야로에서 활촉 등의 무기를 만들었고, 투항한 왜군 조총병을 비변사에 인도하여 화약 제조법과 조총 사용법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1594년(선조 27) 의령에 주둔하였을 때 군량을 모으기 위하여 각 사찰의 전답에 봄보리를 심도록 하고, 산성 주위를 개간하여 정유재란이 끝날 때까지 군량미 4,000여 석을 갖추도록 하였다. 선조는 사명대사의 공로를 크게 인정하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의 벼슬을 내렸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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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 ↑ 양혜원, "유정(사명대사) (惟政)",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목정배,
"유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사명 유정 지음, 이상현 옮김, 『사명대사집』, 동국대학교출판부, 2014, 9쪽.
- ↑ 사명 유정 지음, 이상현 옮김, 『사명대사집』, 동국대학교출판부, 2014, 9쪽.
- ↑ 사명 유정 지음, 이상현 옮김, 『사명대사집』, 동국대학교출판부, 2014, 9-10쪽.
- ↑ 손경희, "사명대사",
『디지털김천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사명 유정 지음, 이상현 옮김, 『사명대사집』, 동국대학교출판부, 2014, 11쪽.
- ↑ 목정배,
"유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손경희, "사명대사",
『디지털김천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이지관,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102-137쪽.
- "해인사사명대사석장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