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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78년 [[휴정|서산대사]]의 문하를 떠나 금강산 보덕암(報德庵)으로 들어가 세번의 안거(安居)를 지내며 「동해사」 등 많은 시를 지었다. 1579년 『선가귀감』의 발문, 1580년 「부석사 안양루 중창기문」을 짓고 썼다. 이어 팔공산, 지리산, 청량산, 태백산 등을 순력하면서, 특히 태백산 운망사(雲望寺)의 이름을 고쳐 영은사(靈隱寺)라 한 것으로 보인다. 1583년 가을 관서로 가는 도중에 귀양살이하는 친한 벗 [[허봉|하곡]]을 생각하며 시를 지었다. 1586년 봄 옥천(沃天)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던 중 간밤의 비바람에 떨어진 낙화를 보고 문득 '무상(無常)'의 법을 깨달았다. 이에 제자들을 다 돌려보내고 홀로 선방에 들어가 가부좌하고 열흘 동안 선정에 들었다. 1589년에는 오대산 영감난야에 머물면서 「월정사 법당의 서까래를 고치고 올린 글」을 지어 모금하며 사찰의 중수에 매달렸다. 이 가운데 [[정여립]]의 역보 사건에 모함을 받아 투옥되었으나 강릉 사림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5년 동안 계속된 공사는 단오절을 맞아 낙성식과 향조대회를 열어 완성을 고한 다음 유정은 금간산으로 들어갔다.<ref>사명 유정 지음, 이상현 옮김, 『사명대사집』, 동국대학교출판부, 2014, 9-10쪽.</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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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5일 (화) 13:15 판
유정(惟政) | |
대표명칭 | 유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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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惟政 |
생몰년 | 1544년(중종 39)-1610년(광해군 2) |
시호 |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
호 | 사명당(四溟堂), 사명(四溟), 송운(松雲) |
법명 | 유정(惟政) |
자 | 이환(離幻) |
이칭 | 종봉(鍾峯) |
성씨 | 임씨 |
본관 | 풍천(豊川) |
속명 | 임응규(任應奎) |
출신지 | 경상남도 밀양 |
승탑 |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 |
승탑비 |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비 |
목차
정의
조선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유정은 1544년(중종 39) 10월 17일에 밀양(密陽)의 삼강동에서 임수성(任守成)과 그 부인인 달성서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정의 집안은 선대에 대대로 명성과 신망이 높았던 풍천의 이름난 집안이었다. 증조부 임효곤(任孝昆)은 문과에 급제하여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조부 임종원(任宗元)은 강계부사를 지냈는데, 증조부가 일찍이 대구의 수령을 지냈기 때문에 밀양에 살게 되었다. 그가 태어나던 날에는 어머니가 꿈에 흰 구름을 타고 황색 두건을 쓴 금인(金人)을 데리고 만 길이나 되는 높은 대에 올라가니 늙은 신선이 그 위에 걸터앉아 있다가 머리를 땅에 대고 절을 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1]
출가수행
유정은 7세를 전후하여 역사를 배우고, 13세 때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를 배웠다. 1558년(명종 13) 어머니가 죽고, 1559년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다.[2]
활동
임진왜란 이전
유정은 1561년 선과(禪科)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한 후 봉은사에 머물며 불교 경전을 부지런히 읽었다. 20여 세에 동녀배들로 갑회(甲會)를 조직하고 갑회문을 지어 나라와 백성을 위해 기도하며 건전한 승려 생활을 실행하자는 뜻을 다짐하였다. 한편 사암(思菴) 박순(朴淳),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자순(子順) 임제(林悌), 손곡(蓀谷) 이달(李達) 등 사대부 문인들과 시를 지으며 교유하였다. 한번은 하곡(荷谷) 허봉(許篈)과 중국의 문장가 한유(韓愈)의 글 한 편을 외우는 내기에 이겨 책 한 권을 받았다.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이 이야기를 듣고 "재주만 믿고 스스로 만족하면 학문에 발전은 없을 것"이라 하니, 이 말을 새겨듣고 공부에 열중하였으며,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에게서 많은 책을 빌려 읽는 이외에도 사자(四子, 공자·맹자·증자·자사)와 이백(李白), 두보(杜甫)의 시를 배워 일취월장하였다.[3]
유정은 1573년 직지사 주지로 있으면서 허응당(虛應堂) 보우(普雨)의 문집과 잡저의 간행에 발문을 쓰고 교정을 보았다. 1575년 선종(禪宗)의 수찰(首刹)인 봉은사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 서산대사의 문하로 들어갔다. 이로부터 3년 동안 수행을 거듭하였으며, 그 사이에 유정은 대동강 부벽루(浮碧樓)에 오르고, 고운 최치원의 족적을 따라 해인사를 비롯하여 사천 곤양성(昆陽城)과 하동 악양루(岳陽樓)를 유력하였다.[4]
1578년 서산대사의 문하를 떠나 금강산 보덕암(報德庵)으로 들어가 세번의 안거(安居)를 지내며 「동해사」 등 많은 시를 지었다. 1579년 『선가귀감』의 발문, 1580년 「부석사 안양루 중창기문」을 짓고 썼다. 이어 팔공산, 지리산, 청량산, 태백산 등을 순력하면서, 특히 태백산 운망사(雲望寺)의 이름을 고쳐 영은사(靈隱寺)라 한 것으로 보인다. 1583년 가을 관서로 가는 도중에 귀양살이하는 친한 벗 하곡을 생각하며 시를 지었다. 1586년 봄 옥천(沃天)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던 중 간밤의 비바람에 떨어진 낙화를 보고 문득 '무상(無常)'의 법을 깨달았다. 이에 제자들을 다 돌려보내고 홀로 선방에 들어가 가부좌하고 열흘 동안 선정에 들었다. 1589년에는 오대산 영감난야에 머물면서 「월정사 법당의 서까래를 고치고 올린 글」을 지어 모금하며 사찰의 중수에 매달렸다. 이 가운데 정여립의 역보 사건에 모함을 받아 투옥되었으나 강릉 사림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5년 동안 계속된 공사는 단오절을 맞아 낙성식과 향조대회를 열어 완성을 고한 다음 유정은 금간산으로 들어갔다.[5]
임진왜란
입적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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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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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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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양혜원, "유정(사명대사) (惟政)",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목정배,
"유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사명 유정 지음, 이상현 옮김, 『사명대사집』, 동국대학교출판부, 2014, 9쪽.
- ↑ 사명 유정 지음, 이상현 옮김, 『사명대사집』, 동국대학교출판부, 2014, 9쪽.
- ↑ 사명 유정 지음, 이상현 옮김, 『사명대사집』, 동국대학교출판부, 2014, 9-10쪽.
참고문헌
- 이지관,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102-137쪽.
- "해인사사명대사석장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