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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계량이 삼가 그의 제자 조림(祖琳)이 지은 행장(行狀)을 상고하여 보니, 사(師)의 휘는 자초(自超)이며, 호(號)는 무학(無學)이고, 살던 곳은 계월헌(溪月軒)이라고 하였다. 세수는 79세이며, 법랍(法臘)은 61세이다. 속성(俗姓)은 박씨니 삼기군(三岐郡) 사람이다. 아버지의 휘는 인일(仁一)이며 증 숭정문하시랑(贈崇政門下侍郞)이고, 모(母)는 고성(固城) 채씨(蔡氏)이다. 채씨가 꿈에 아침해가 품속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임신하여 태정(泰定) 정묘년 9월 20일에 사를 낳았다. | 신 계량이 삼가 그의 제자 조림(祖琳)이 지은 행장(行狀)을 상고하여 보니, 사(師)의 휘는 자초(自超)이며, 호(號)는 무학(無學)이고, 살던 곳은 계월헌(溪月軒)이라고 하였다. 세수는 79세이며, 법랍(法臘)은 61세이다. 속성(俗姓)은 박씨니 삼기군(三岐郡) 사람이다. 아버지의 휘는 인일(仁一)이며 증 숭정문하시랑(贈崇政門下侍郞)이고, 모(母)는 고성(固城) 채씨(蔡氏)이다. 채씨가 꿈에 아침해가 품속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임신하여 태정(泰定) 정묘년 9월 20일에 사를 낳았다. | ||
− | |출처=변계량, 「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 『동문선(東文選)』. | + | |출처=변계량, 「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 『동문선(東文選)』. 온라인 참조: "[http://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65A_1210_010_0030 묘엄존자탑명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 고전번역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고전종합DB』<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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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18세가 되어서 벗어 버리듯 티끌세상 밖에 나가고자 하는 뜻이 있어서 혜감국사(慧鑑國師)의 상족제자(上足弟子 수제자)인 소지선사(小止禪師)에게 머리를 깎고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 나이 18세가 되어서 벗어 버리듯 티끌세상 밖에 나가고자 하는 뜻이 있어서 혜감국사(慧鑑國師)의 상족제자(上足弟子 수제자)인 소지선사(小止禪師)에게 머리를 깎고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 ||
용문산(龍門山)에 이르러 혜명국사(慧明國師)와 법장국사(法藏國師)에게 법을 물으니, 법의 교시(敎示)를 마치고 곧 말하기를, “바른 길을 얻은 자가 너 아니고 누구겠느냐.” 하고, 드디어 부도암(浮圖菴)에 살게 하였다. 하루는 암자 안에서 화재가 일어났는데 사(師)가 홀로 나무 허수아비처럼 고요히 앉아 있으니, 여러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기었다. 병술년 가을에 《능엄경(楞嚴經)》을 보다가 깨달은 것이 있어 돌아가 그의 스승에게 고하니, 스승이 칭탄하였다. 이로부터 잠을 자지 않고 밥 먹는 것도 잊은 채 참선에만 전심하였다. 기축년 가을에 진주(鎭州)의 길상사(吉祥寺)에 이르러 살았으며, 임진년 여름에는 묘향산 금강굴(妙香山金剛窟)에 머무렀는데, 공부가 더욱 진보하였다. | 용문산(龍門山)에 이르러 혜명국사(慧明國師)와 법장국사(法藏國師)에게 법을 물으니, 법의 교시(敎示)를 마치고 곧 말하기를, “바른 길을 얻은 자가 너 아니고 누구겠느냐.” 하고, 드디어 부도암(浮圖菴)에 살게 하였다. 하루는 암자 안에서 화재가 일어났는데 사(師)가 홀로 나무 허수아비처럼 고요히 앉아 있으니, 여러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기었다. 병술년 가을에 《능엄경(楞嚴經)》을 보다가 깨달은 것이 있어 돌아가 그의 스승에게 고하니, 스승이 칭탄하였다. 이로부터 잠을 자지 않고 밥 먹는 것도 잊은 채 참선에만 전심하였다. 기축년 가을에 진주(鎭州)의 길상사(吉祥寺)에 이르러 살았으며, 임진년 여름에는 묘향산 금강굴(妙香山金剛窟)에 머무렀는데, 공부가 더욱 진보하였다. | ||
− | |출처= | + | |출처=변계량, 「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 『동문선(東文選)』. 온라인 참조: "[http://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65A_1210_010_0030 묘엄존자탑명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 고전번역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고전종합DB』<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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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건만 산천을 두루 유람하고 스승과 벗을 참방(參訪)할 뜻이 그치지 아니하였다. 강소(江蘇), 절강(浙江) 지방에 유람하려 하였으나, 그때 남쪽 지방에 변란이 있어서 길이 막혔으므로 중지하였다. | 그렇건만 산천을 두루 유람하고 스승과 벗을 참방(參訪)할 뜻이 그치지 아니하였다. 강소(江蘇), 절강(浙江) 지방에 유람하려 하였으나, 그때 남쪽 지방에 변란이 있어서 길이 막혔으므로 중지하였다. | ||
병신년 여름에 우리 나라에 돌아오고자 작별을 고하니, 옹이 손수 한 종이에 글을 써서 전송하여 말하기를, “그 일상생활을 보니 모든 기틀이 세상과 더불어 다른 데가 있다. 선악과 성사(聖邪)를 생각지 않고 인정과 의리에 순종하지 않는다. 말을 내고 기운을 토할 때에는 화살과 칼날이 서로 버티는 것 같고, 글귀의 뜻이 기틀에 맞음은 물이 물에 돌아가는 것 같다. | 병신년 여름에 우리 나라에 돌아오고자 작별을 고하니, 옹이 손수 한 종이에 글을 써서 전송하여 말하기를, “그 일상생활을 보니 모든 기틀이 세상과 더불어 다른 데가 있다. 선악과 성사(聖邪)를 생각지 않고 인정과 의리에 순종하지 않는다. 말을 내고 기운을 토할 때에는 화살과 칼날이 서로 버티는 것 같고, 글귀의 뜻이 기틀에 맞음은 물이 물에 돌아가는 것 같다. | ||
− | |출처= | + | |출처=변계량, 「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 『동문선(東文選)』. 온라인 참조: "[http://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65A_1210_010_0030 묘엄존자탑명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 고전번역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고전종합DB』<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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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師)가 이미 돌아오니 나옹(懶翁) 또한 지공(指空)의 삼산양수수기(三山兩水授記)를 갖고 돌아와 천성산(天聖山) 원효암(元曉菴)에 머무르고 있었다. | 사(師)가 이미 돌아오니 나옹(懶翁) 또한 지공(指空)의 삼산양수수기(三山兩水授記)를 갖고 돌아와 천성산(天聖山) 원효암(元曉菴)에 머무르고 있었다. | ||
기해년 여름에, 사가 가서 나옹을 뵈오니 불자(拂子)를 그에게 주었다. 옹이 신광사(神光寺)에 있으므로 사 또한 거기에 머물렀더니, 옹의 무리 중에 사를 꺼리는 자가 있었다. 사가 알고 떠나가니, 옹이 사에게 말하기를, “법통을 전하는 데 있어서 옷과 바리때[衣鉢]는 말과 글귀보다 못하다.” 하고, 시를 지어 사에게 주며 말하기를, “한가한 중들이 남이니 나니 교계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망령되게 옳으니 그르니 하고 말들을 하니, 매우 옳지 않다. 산승(山僧)이 이 네 귀[四句]의 송(頌)으로써 길이 뒷날의 의심을 끊는다.” 하였다. | 기해년 여름에, 사가 가서 나옹을 뵈오니 불자(拂子)를 그에게 주었다. 옹이 신광사(神光寺)에 있으므로 사 또한 거기에 머물렀더니, 옹의 무리 중에 사를 꺼리는 자가 있었다. 사가 알고 떠나가니, 옹이 사에게 말하기를, “법통을 전하는 데 있어서 옷과 바리때[衣鉢]는 말과 글귀보다 못하다.” 하고, 시를 지어 사에게 주며 말하기를, “한가한 중들이 남이니 나니 교계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망령되게 옳으니 그르니 하고 말들을 하니, 매우 옳지 않다. 산승(山僧)이 이 네 귀[四句]의 송(頌)으로써 길이 뒷날의 의심을 끊는다.” 하였다. | ||
− | |출처= | + | |출처=변계량, 「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 『동문선(東文選)』. 온라인 참조: "[http://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65A_1210_010_0030 묘엄존자탑명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 고전번역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고전종합DB』<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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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師)가 고달산(高達山) 탁암(卓菴)에 들어가 도를 닦고 있었는데, 신해년 겨울에 전조(前朝)의 공민왕이 나옹을 봉하여 왕사(王師)로 하고, 옹이 송광사(松廣寺)에 머무르면서 의발을 사에게 전하니 사가 게(偈)를 지어 사례하였다. | 사(師)가 고달산(高達山) 탁암(卓菴)에 들어가 도를 닦고 있었는데, 신해년 겨울에 전조(前朝)의 공민왕이 나옹을 봉하여 왕사(王師)로 하고, 옹이 송광사(松廣寺)에 머무르면서 의발을 사에게 전하니 사가 게(偈)를 지어 사례하였다. | ||
병진년 여름에 나옹이 회암사(檜巖寺)에 옮겨 가서 크게 낙성회를 개설하게 되었다. 급히 편지를 보내어 사를 불러다가 수좌(首坐)를 삼으니, 사가 극력 사양하였다. 옹이 말하기를, “많이 주관하는 것이 많이 사퇴하는 것만 같지 못한 것이지.” 하고, 제덕산(濟德山)에서는 수좌를 삼지 않고 와서 편실(便室)에 있게 하였다. 옹이 세상을 떠나니, 사가 여러 산으로 노닐면서 뜻을 감추고 남에게 알리고자 하지 않았다. | 병진년 여름에 나옹이 회암사(檜巖寺)에 옮겨 가서 크게 낙성회를 개설하게 되었다. 급히 편지를 보내어 사를 불러다가 수좌(首坐)를 삼으니, 사가 극력 사양하였다. 옹이 말하기를, “많이 주관하는 것이 많이 사퇴하는 것만 같지 못한 것이지.” 하고, 제덕산(濟德山)에서는 수좌를 삼지 않고 와서 편실(便室)에 있게 하였다. 옹이 세상을 떠나니, 사가 여러 산으로 노닐면서 뜻을 감추고 남에게 알리고자 하지 않았다. | ||
− | |출처= | + | |출처=변계량, 「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 『동문선(東文選)』. 온라인 참조: "[http://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65A_1210_010_0030 묘엄존자탑명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 고전번역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고전종합DB』<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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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정(柳爰廷)을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삼고, 박의중(朴宜中)을 예문춘추관 학사(藝文春秋館學士)로 삼고, 대성(臺省)의 낭관(郞官)을 모두 체천(遞遷) 하고, 중 자초(自超)를 봉하여 왕사(王師)로 삼았다. | 유원정(柳爰廷)을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삼고, 박의중(朴宜中)을 예문춘추관 학사(藝文春秋館學士)로 삼고, 대성(臺省)의 낭관(郞官)을 모두 체천(遞遷) 하고, 중 자초(自超)를 봉하여 왕사(王師)로 삼았다. | ||
− | |출처= | + | |출처=변계량, 「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 『동문선(東文選)』. 온라인 참조: "[http://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65A_1210_010_0030 묘엄존자탑명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 고전번역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고전종합DB』<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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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년에 태조가 풍수를 살펴 수도를 세우고자 하여 사(師)에게 수가(隨駕)를 명하였다. 사가 사양하니 태조가 사에게 이르기를, “지금이나 예전이나 서로 만난다는 것은 인연이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의 터잡는 것이 어찌 도사(道師)의 눈만하겠는가.” 하였다. 계룡산과 지금의 신도(新都)를 순행(巡幸)할 때, 사가 항상 호종(扈從)하였다. 그 해 9월에 사가 선사(先師) 지공(指空)ㆍ나옹(懶翁)의 두 탑(塔)의 명칭과 나옹의 진영(眞影)을 거는 일로써 왕지(王旨)를 받들어 회암사(檜巖寺)에 탑명(塔名)을 새기고, 광명사(廣明寺)에 괘진불사(掛眞佛事)를 크게 개설하였다. | 계유년에 태조가 풍수를 살펴 수도를 세우고자 하여 사(師)에게 수가(隨駕)를 명하였다. 사가 사양하니 태조가 사에게 이르기를, “지금이나 예전이나 서로 만난다는 것은 인연이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의 터잡는 것이 어찌 도사(道師)의 눈만하겠는가.” 하였다. 계룡산과 지금의 신도(新都)를 순행(巡幸)할 때, 사가 항상 호종(扈從)하였다. 그 해 9월에 사가 선사(先師) 지공(指空)ㆍ나옹(懶翁)의 두 탑(塔)의 명칭과 나옹의 진영(眞影)을 거는 일로써 왕지(王旨)를 받들어 회암사(檜巖寺)에 탑명(塔名)을 새기고, 광명사(廣明寺)에 괘진불사(掛眞佛事)를 크게 개설하였다. | ||
− | |출처= | + | |출처=변계량, 「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 『동문선(東文選)』. 온라인 참조: "[http://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65A_1210_010_0030 묘엄존자탑명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 고전번역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고전종합DB』<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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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년 봄에 약간 병이 났으므로 모시는 자가 의약을 드리고자 하니, 사가 거절하며 말하기를, “80세에 병들었는데 약은 써서 무엇한단 말이냐.” 하였다. 여름 4월에 금장암(金藏菴)에 옮겨갔으니, 바로 그가 입적(入寂)한 곳이다. 8월에 의안대군(義安大君)이 사람을 시켜 편지를 보내왔었는데, 사(師)의 회답 편지에, “멀리 산중에 살고 있어서 만나 뵈올 기회가 없습니다. 어느 때 불회(佛會)에서 뵙고자 합니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멀지 않아 나는 갈 것이다.” 하였다. 얼마 뒤에 과연 사(師)의 병이 위독하였다. 중이 묻기를, “사대(四大)가 제각기 떠나서 어느 곳으로 갑니까.” 하니, 사(師)는 “모르겠다.” 하였다. 또 물으니, 사가 성난 목소리로, “모른다.” 하였다. 또 중이 묻기를, “화상(和尙)은 병든 가운데 도리어 병들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까.” 하니, 사가 손으로 곁에 있는 중을 가리켰다. 또 묻기를, “육신이라는 것은 지ㆍ수ㆍ화ㆍ풍일 뿐이니, 어느 것이 진정한 법신(法身)입니까.” 하니, 사가 두 팔을 서로 버티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곧 하나이다.” 하였다. 대답을 마치고 고요히 세상을 떠나니, 한밤중이었다. | 을유년 봄에 약간 병이 났으므로 모시는 자가 의약을 드리고자 하니, 사가 거절하며 말하기를, “80세에 병들었는데 약은 써서 무엇한단 말이냐.” 하였다. 여름 4월에 금장암(金藏菴)에 옮겨갔으니, 바로 그가 입적(入寂)한 곳이다. 8월에 의안대군(義安大君)이 사람을 시켜 편지를 보내왔었는데, 사(師)의 회답 편지에, “멀리 산중에 살고 있어서 만나 뵈올 기회가 없습니다. 어느 때 불회(佛會)에서 뵙고자 합니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멀지 않아 나는 갈 것이다.” 하였다. 얼마 뒤에 과연 사(師)의 병이 위독하였다. 중이 묻기를, “사대(四大)가 제각기 떠나서 어느 곳으로 갑니까.” 하니, 사(師)는 “모르겠다.” 하였다. 또 물으니, 사가 성난 목소리로, “모른다.” 하였다. 또 중이 묻기를, “화상(和尙)은 병든 가운데 도리어 병들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까.” 하니, 사가 손으로 곁에 있는 중을 가리켰다. 또 묻기를, “육신이라는 것은 지ㆍ수ㆍ화ㆍ풍일 뿐이니, 어느 것이 진정한 법신(法身)입니까.” 하니, 사가 두 팔을 서로 버티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곧 하나이다.” 하였다. 대답을 마치고 고요히 세상을 떠나니, 한밤중이었다. | ||
− | |출처= | + | |출처=변계량, 「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 『동문선(東文選)』. 온라인 참조: "[http://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65A_1210_010_0030 묘엄존자탑명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 고전번역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고전종합DB』<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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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4일 (월) 02:18 판
자초(自超) | |
대표명칭 | 자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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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自超 |
생몰년 | 1327(충숙왕 14)-1405(태종 5) |
호 | 무학(無學), 계월헌(溪月軒) |
성씨 | 박씨(朴氏) |
출신지 |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
승탑 |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
승탑비 | 양주 회암사 무학대사비 |
정의
고려 말-조선 초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자초(自超)는 1327년(충숙왕 14)에 태어났다. 성은 박씨(朴氏), 호는 무학(無學), 당호는 계월헌(溪月軒), 법명은 자초(自超)이다.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출신이다. 아버지는 인일(仁一)이고 후에 숭정문화시랑(贈崇政門下侍郞)으로 추증되었다.[1] 자초는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다는 기록도 있다.
연경재(硏經齋) 성해응(成海應)이 지은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에 그가 충남 서산 간월도(看月島)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나 『서산군읍지(瑞山郡邑誌)』 인물조에 무학신승(武學神僧)이 간월도(看月島)에 머물렀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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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계량이 삼가 그의 제자 조림(祖琳)이 지은 행장(行狀)을 상고하여 보니, 사(師)의 휘는 자초(自超)이며, 호(號)는 무학(無學)이고, 살던 곳은 계월헌(溪月軒)이라고 하였다. 세수는 79세이며, 법랍(法臘)은 61세이다. 속성(俗姓)은 박씨니 삼기군(三岐郡) 사람이다. 아버지의 휘는 인일(仁一)이며 증 숭정문하시랑(贈崇政門下侍郞)이고, 모(母)는 고성(固城) 채씨(蔡氏)이다. 채씨가 꿈에 아침해가 품속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임신하여 태정(泰定) 정묘년 9월 20일에 사를 낳았다.
|출처=변계량, 「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 『동문선(東文選)』. 온라인 참조: "묘엄존자탑명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 고전번역서,
- 탁효정, 여말선초 무학자초의 활동과 위상, 『회암사지박물관 연구총서』4 - 회암사와 불교사, 양주회암사지박물관, 2016, 176-207쪽.
- 황인규, 無學自超 硏究
- 황인규, 仁王山寺와_無學大師
- 황인규, 무학자초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검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