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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이민정,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75 이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ref>이민정,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75 이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이황의 생애=== | ===이황의 생애=== | ||
− | ====이황의 | + | ====이황의 어린시절==== |
이황은 1501년(연산군 7) 11월 25일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에서 태어났다. 이황이 태어난지 7개월 만에 부친 [[이식]]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어머니 춘천 박씨의 손에서 자랐다. 12살부터 숙부인 [[이우]]에게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23살때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혼란스러운 분위기에 2달만에 성균관을 떠나게 되나, 여기서 [[김인후]]와의 친분을 쌓는다. 이황은 33세인 1533년(중종 28)에 다시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그 해 가을 [[김안국]]과의 친분을 쌓는다. | 이황은 1501년(연산군 7) 11월 25일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에서 태어났다. 이황이 태어난지 7개월 만에 부친 [[이식]]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어머니 춘천 박씨의 손에서 자랐다. 12살부터 숙부인 [[이우]]에게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23살때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혼란스러운 분위기에 2달만에 성균관을 떠나게 되나, 여기서 [[김인후]]와의 친분을 쌓는다. 이황은 33세인 1533년(중종 28)에 다시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그 해 가을 [[김안국]]과의 친분을 쌓는다. | ||
<ref>이민정,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75 이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ref>이민정,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75 이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 | ===이황의 정계활동=== | + | ====이황의 정계활동==== |
이황은 1534년(중종 29)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사화가 이어지는 혼란스러운 시기였기 때문에, 이황의 벼슬길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황은 1521년(중종 16) 21세 때 결혼한 허씨가 1527년 세상을 떠나자 1529년 안동 권씨에게 다시 장가를 들었다. 이황의 장인인 [[권질|권질(權礩)]]은 [[권전|정언(正言) 권전(權磌)]]의 형이었는데, 권전은 기묘사림으로 [[기묘사화]] 당시 파직된 후 [[안처겸|안처겸(安處謙)]]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죽었다. 1535년에는 호송관(護送官)에 임명되어 왜노(倭奴)를 동래(東萊)까지 이송하기도 했는데, 당시 여주(驪州)의 목사로 있던 [[이순|이순(李純)]]과 [[여주 신륵사|신륵사(神勒寺)]]에서 노닐며 『[[황극경세서|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와 『[[참동계|참동계(參同契)]]』에 대해 논하기도 하였다. 1548년(명종 3) 이황은 외직(外職)을 요청하여 단양군수(丹陽郡守)로 부임하였다. 10월 넷째 형 [[이해]]가 충청감사로 부임하면서 [[상피제|상피제(相避制)]]로 인해 풍기군수(豊基郡守)로 옮겨갔다. 1549년 12월에는 [[백운동서원|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 편액과 서적을 내려줄 것을 감사에게 청하였다.<ref>이민정,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75 이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이황은 1534년(중종 29)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사화가 이어지는 혼란스러운 시기였기 때문에, 이황의 벼슬길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황은 1521년(중종 16) 21세 때 결혼한 허씨가 1527년 세상을 떠나자 1529년 안동 권씨에게 다시 장가를 들었다. 이황의 장인인 [[권질|권질(權礩)]]은 [[권전|정언(正言) 권전(權磌)]]의 형이었는데, 권전은 기묘사림으로 [[기묘사화]] 당시 파직된 후 [[안처겸|안처겸(安處謙)]]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죽었다. 1535년에는 호송관(護送官)에 임명되어 왜노(倭奴)를 동래(東萊)까지 이송하기도 했는데, 당시 여주(驪州)의 목사로 있던 [[이순|이순(李純)]]과 [[여주 신륵사|신륵사(神勒寺)]]에서 노닐며 『[[황극경세서|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와 『[[참동계|참동계(參同契)]]』에 대해 논하기도 하였다. 1548년(명종 3) 이황은 외직(外職)을 요청하여 단양군수(丹陽郡守)로 부임하였다. 10월 넷째 형 [[이해]]가 충청감사로 부임하면서 [[상피제|상피제(相避制)]]로 인해 풍기군수(豊基郡守)로 옮겨갔다. 1549년 12월에는 [[백운동서원|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 편액과 서적을 내려줄 것을 감사에게 청하였다.<ref>이민정,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75 이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 | ===[[기대승]]과의 [[사단칠정논쟁]]=== | + | ====[[기대승]]과의 [[사단칠정논쟁]]==== |
이황은 결국 고향에 은거하면서 지방에서 제자를 기르는 방법을 택하였다. 병으로 감사에게 수차례 사직 의사를 표명하고 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고향으로 돌아왔다. 1550년에 신진학자 [[기대승]]에게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대해 논변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사단칠정논쟁]]’이다. | 이황은 결국 고향에 은거하면서 지방에서 제자를 기르는 방법을 택하였다. 병으로 감사에게 수차례 사직 의사를 표명하고 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고향으로 돌아왔다. 1550년에 신진학자 [[기대승]]에게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대해 논변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사단칠정논쟁]]’이다. | ||
<ref>이민정,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75 이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ref>이민정,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75 이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 | ===[[성학십도]]=== | + | ====[[성학십도]]==== |
[[조선 명종|명종]]은 이황을 계속 중앙정계로 복귀시키려 하였지만, 한번 마음을 굳힌 이황은 좀처럼 다시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조선 선조|선조]] 또한 이황을 깊게 사모하여 수차례 벼슬을 내렸지만 이황은 나아가지 않았다. 대신 그는 1568년(선조 1) 8월 「무진육조소」를 올려 ‘계통을 중히 하여 인효(仁孝)를 온전히 할 것’, ‘참소하고 이간하는 것을 막아서 양궁을 친하게 할 것’, ‘성학(聖學)을 독실히 하시어 정치의 근본으로 삼을 것’, ‘도덕과 학술을 밝혀서 인심을 바르게 할 것’, ‘심복(心腹)에게 맡기셔서 이목(耳目)을 통하게 할 것’, ‘성심으로 몸을 닦고 살펴서 하늘의 사랑을 받게 할 것’을 간하였다. 이어 12월에는 성군이 되기 위한 학문의 원리를 열 가지 도설로 정리한 『 [[성학십도|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올려 새로운 임금에게 거는 기대를 드러냈다. | [[조선 명종|명종]]은 이황을 계속 중앙정계로 복귀시키려 하였지만, 한번 마음을 굳힌 이황은 좀처럼 다시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조선 선조|선조]] 또한 이황을 깊게 사모하여 수차례 벼슬을 내렸지만 이황은 나아가지 않았다. 대신 그는 1568년(선조 1) 8월 「무진육조소」를 올려 ‘계통을 중히 하여 인효(仁孝)를 온전히 할 것’, ‘참소하고 이간하는 것을 막아서 양궁을 친하게 할 것’, ‘성학(聖學)을 독실히 하시어 정치의 근본으로 삼을 것’, ‘도덕과 학술을 밝혀서 인심을 바르게 할 것’, ‘심복(心腹)에게 맡기셔서 이목(耳目)을 통하게 할 것’, ‘성심으로 몸을 닦고 살펴서 하늘의 사랑을 받게 할 것’을 간하였다. 이어 12월에는 성군이 되기 위한 학문의 원리를 열 가지 도설로 정리한 『 [[성학십도|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올려 새로운 임금에게 거는 기대를 드러냈다. | ||
− | ===은퇴와 [[도산서원]]=== | + | ====은퇴와 [[도산서원]]==== |
1550년(명종 5) 2월 비로소 퇴계(退溪) 서쪽에 자리를 잡았다. 1559년(명종 14)에는 [[도산서원|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강학에 본격적으로 힘쓰기 시작하였다. 이황은 도산서당을 중심으로 강학활동을 계속하다 1570년(선조 3) 12월 지병이 악화되자 주변을 정리한 후 세상을 떠났다. [[조선 선조|선조]]는 이황이 병환 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내의원]]으로 하여금 약을 보내 구원하게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이황의 죽음이 전해지자 애도하는 뜻으로 3일 동안 정사를 폐할 것을 명하였으며, 영의정의 예에 따라 장사지내도록 하였다. 1572년에 이황의 위패를 [[상덕사]]에 모실 것을 결정하였으며, 그 2년 뒤에는 지방 유림의 공의로서 사당을 지어 위패를 봉안하였고, 이황이 강학활동을 하던 도산서당에 전교당과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하였다. 이 서원은 1575년(선조 8)에 [[한호|한호(韓濩)]]가 쓴 ‘ [[도산서원|도산서원(陶山書院)]]’이란 편액을 하사받았으며, 이후 영남유학의 총본산으로 인정받았다. <ref>이민정,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75 이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1550년(명종 5) 2월 비로소 퇴계(退溪) 서쪽에 자리를 잡았다. 1559년(명종 14)에는 [[도산서원|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강학에 본격적으로 힘쓰기 시작하였다. 이황은 도산서당을 중심으로 강학활동을 계속하다 1570년(선조 3) 12월 지병이 악화되자 주변을 정리한 후 세상을 떠났다. [[조선 선조|선조]]는 이황이 병환 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내의원]]으로 하여금 약을 보내 구원하게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이황의 죽음이 전해지자 애도하는 뜻으로 3일 동안 정사를 폐할 것을 명하였으며, 영의정의 예에 따라 장사지내도록 하였다. 1572년에 이황의 위패를 [[상덕사]]에 모실 것을 결정하였으며, 그 2년 뒤에는 지방 유림의 공의로서 사당을 지어 위패를 봉안하였고, 이황이 강학활동을 하던 도산서당에 전교당과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하였다. 이 서원은 1575년(선조 8)에 [[한호|한호(韓濩)]]가 쓴 ‘ [[도산서원|도산서원(陶山書院)]]’이란 편액을 하사받았으며, 이후 영남유학의 총본산으로 인정받았다. <ref>이민정,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75 이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2017년 8월 13일 (일) 00:35 판
이황(李滉) | |
대표명칭 | 이황 |
---|---|
한자표기 | 李滉 |
생몰년 | 1501-1570 |
본관 | 진보(眞寶) |
시호 | 문순(文純) |
호 | 퇴계(退溪), 퇴도(退陶) |
자 | 경호(景浩) |
시대 | 조선 |
대표저서 | 성학십도, 심경후론, 주자서절요 |
대표직함 | 풍기군수, 성균관대사성, 단양군수, 대제학 |
부 | 이식 |
모 | 이식 처 춘천 박씨 |
목차
정의
조선후기의 문신·학자로 연산군과 선조대의 인물이다. 인간 심성론에 대한 연구와 강학을 통해 조선 성리학(性理學)의 수준을 격상시킨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내용
이황의 가정환경
이황은 무신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황의 할아버지인 이계양(李繼陽)은 소과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더 이상 과거 합격에 뜻을 두지 않고 시골에 은거하여 후손을 가르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이계양의 첫째아들이자 이황의 부친인 이식(李埴)도 학문이 뛰어났다. 동생 이우(李堣)와 함께 학자들에게 칭송받았으며, 특히 박학다식함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우는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좌랑(吏曹佐郞), 사간원 사간(司諫院 司諫) 등을 역임하였으며, 중종반정(中宗反正) 당시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이 되었다. 이후 호조참판(戶曹參判),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이우는 아버지를 일찍 여읜 이황에게는 아버지이자 스승의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했다. [1]
이황의 생애
이황의 어린시절
이황은 1501년(연산군 7) 11월 25일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에서 태어났다. 이황이 태어난지 7개월 만에 부친 이식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어머니 춘천 박씨의 손에서 자랐다. 12살부터 숙부인 이우에게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23살때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혼란스러운 분위기에 2달만에 성균관을 떠나게 되나, 여기서 김인후와의 친분을 쌓는다. 이황은 33세인 1533년(중종 28)에 다시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그 해 가을 김안국과의 친분을 쌓는다. [2]
이황의 정계활동
이황은 1534년(중종 29)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사화가 이어지는 혼란스러운 시기였기 때문에, 이황의 벼슬길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황은 1521년(중종 16) 21세 때 결혼한 허씨가 1527년 세상을 떠나자 1529년 안동 권씨에게 다시 장가를 들었다. 이황의 장인인 권질(權礩)은 정언(正言) 권전(權磌)의 형이었는데, 권전은 기묘사림으로 기묘사화 당시 파직된 후 안처겸(安處謙)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죽었다. 1535년에는 호송관(護送官)에 임명되어 왜노(倭奴)를 동래(東萊)까지 이송하기도 했는데, 당시 여주(驪州)의 목사로 있던 이순(李純)과 신륵사(神勒寺)에서 노닐며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와 『참동계(參同契)』에 대해 논하기도 하였다. 1548년(명종 3) 이황은 외직(外職)을 요청하여 단양군수(丹陽郡守)로 부임하였다. 10월 넷째 형 이해가 충청감사로 부임하면서 상피제(相避制)로 인해 풍기군수(豊基郡守)로 옮겨갔다. 1549년 12월에는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 편액과 서적을 내려줄 것을 감사에게 청하였다.[3]
기대승과의 사단칠정논쟁
이황은 결국 고향에 은거하면서 지방에서 제자를 기르는 방법을 택하였다. 병으로 감사에게 수차례 사직 의사를 표명하고 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고향으로 돌아왔다. 1550년에 신진학자 기대승에게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대해 논변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사단칠정논쟁’이다. [4]
성학십도
명종은 이황을 계속 중앙정계로 복귀시키려 하였지만, 한번 마음을 굳힌 이황은 좀처럼 다시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선조 또한 이황을 깊게 사모하여 수차례 벼슬을 내렸지만 이황은 나아가지 않았다. 대신 그는 1568년(선조 1) 8월 「무진육조소」를 올려 ‘계통을 중히 하여 인효(仁孝)를 온전히 할 것’, ‘참소하고 이간하는 것을 막아서 양궁을 친하게 할 것’, ‘성학(聖學)을 독실히 하시어 정치의 근본으로 삼을 것’, ‘도덕과 학술을 밝혀서 인심을 바르게 할 것’, ‘심복(心腹)에게 맡기셔서 이목(耳目)을 통하게 할 것’, ‘성심으로 몸을 닦고 살펴서 하늘의 사랑을 받게 할 것’을 간하였다. 이어 12월에는 성군이 되기 위한 학문의 원리를 열 가지 도설로 정리한 『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올려 새로운 임금에게 거는 기대를 드러냈다.
은퇴와 도산서원
1550년(명종 5) 2월 비로소 퇴계(退溪) 서쪽에 자리를 잡았다. 1559년(명종 14)에는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강학에 본격적으로 힘쓰기 시작하였다. 이황은 도산서당을 중심으로 강학활동을 계속하다 1570년(선조 3) 12월 지병이 악화되자 주변을 정리한 후 세상을 떠났다. 선조는 이황이 병환 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내의원으로 하여금 약을 보내 구원하게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이황의 죽음이 전해지자 애도하는 뜻으로 3일 동안 정사를 폐할 것을 명하였으며, 영의정의 예에 따라 장사지내도록 하였다. 1572년에 이황의 위패를 상덕사에 모실 것을 결정하였으며, 그 2년 뒤에는 지방 유림의 공의로서 사당을 지어 위패를 봉안하였고, 이황이 강학활동을 하던 도산서당에 전교당과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하였다. 이 서원은 1575년(선조 8)에 한호(韓濩)가 쓴 ‘ 도산서원(陶山書院)’이란 편액을 하사받았으며, 이후 영남유학의 총본산으로 인정받았다. [5]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채응일 | 이황 | A는 B의 어버이다 | |
이만성 | 채응일 처 연안이씨} | A는 B의 어버이다 | |
채응일 처 연안이씨 | 채응일 | A는 B의 아내이다 | |
강박 | 이황 | A는 B의 스승이다 | |
오광운 | 이황 | A는 B의 스승이다 | |
오필운 | 오광운 | A는 B의 형제이다 | |
채제공 처 동복오씨 | 이황 | A는 B의 아내이다 | |
오필운 | 채제공 처 동복오씨 | A는 B의 어버이다 | |
오필운 | 강박 | A는 B와 교유하였다 | |
이황 | 승문원 | A는 B에 소속된다 | 1743년 |
이황 | 홍문관 | A는 B에 소속된다 | 1753년 |
이황 | 열성지장 편찬 | A는 B에 참여하였다 | 1758년 |
이황 | 어제상훈보편 편찬 | A는 B에 참여하였다 | 1758년 |
이황 | 어제속집경당편집 | A는 B에 참여하였다 | 1768년 |
이황 | 국장도감 | A는 B에 소속된다 | 1776년 |
이황 | 영조실록 편찬 | A는 B를 주도하였다 | 1776년 |
이황 | 현륭원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1789년 |
이황 | 화성행궁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이황 | 목만중 | A는 B와 교유하였다 | |
이황 | 유하원 | A는 B와 교유하였다 | |
이황 | 이정운 | A는 B와 교유하였다 | |
이황 | 이익운 | A는 B와 교유하였다 | |
이황 | 정약용 | A는 B와 교유하였다 | |
이황 | 이승훈 | A는 B와 교유하였다 | |
이황 | 이가환 | A는 B와 교유하였다 | |
이황 | 정약종 | A는 B와 교유하였다 | |
이황 | 채홍리 | A는 B와 교유하였다 | |
이황 | 번암집 | A는 B를 저술하였다 | |
이황 | 원행을묘정리의궤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이황 | 가체신금사목 | A는 B에 언급된다 |
주석
- ↑ 이민정, "이황",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이민정, "이황",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이민정, "이황",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이민정, "이황",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이민정, "이황",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 논문
- 백승호,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의 시사(詩社)활동과 그 정치적 활용」, 『漢文學報』26, 우리한문학회, 2012.
- 단행본
- 수원화성박물관, 『번암 채제공의 생애와 활동』, 수원화성박물관, 2013.
유용한 정보
- 박기현, "채제공, 성군 정조를 지킨 보디가드", 명사칼럼,
『문화유산채널』online , 한국문화재재단, 2013년 03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