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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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의==
조선후기의 문신·학자로 [[조선 연산군|연산군]]과 [[조선 선조|선조]]대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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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의 문신·학자로 [[조선 연산군|연산군]]과 [[조선 선조|선조]]대의 인물이다. 인간 심성론에 대한 연구와 강학을 통해 조선 성리학(性理學)의 수준을 격상시킨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내용==
 
==내용==
===성장배경과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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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의 가정환경===
채제공(1720~1799)은 18세기 후반 남인의 영수로 알려진 정치가이다. 충청도 홍주에서 [[채응일|채응일(蔡膺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연안 이씨 [[이만성|이만성(李萬成)]]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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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은 무신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황의 할아버지인 [[이계양|이계양(李繼陽)]]은 소과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더 이상 과거 합격에 뜻을 두지 않고 시골에 은거하여 후손을 가르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이계양의 첫째아들이자 이황의 부친인 [[이식|이식(李埴)]]도 학문이 뛰어났다. 동생 [[이우|이우(李堣)]]와 함께 학자들에게 칭송받았으며, 특히 박학다식함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우]]는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좌랑(吏曹佐郞), 사간원 사간(司諫院 司諫) 등을 역임하였으며, 중종반정(中宗反正) 당시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이 되었다. 이후 호조참판(戶曹參判),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이우는 아버지를 일찍 여읜 이황에게는 아버지이자 스승의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했다.
채제공이 태어나 성장할 무렵의 정치 상황이 그의 가문이 속한 남인들에게 매우 좋지 않았다. [[조선 숙종|숙종]]대의 [[갑술환국]], [[조선 영조|영조]] 초반에 있었던 무신란의 여파로 남인 계열의 주요 인물들이 사사되거나 연루되어 벼슬에 나가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당대 남인 문장가로 알려진 [[강박|강박(姜樸)]]과 영조대 남인 세력의 구심을 이루었던 [[오광운|오광운(吳光運)]]등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강박]][[오광원]]의 형 [[오필운]]의 딸과 채제공의 혼인을 주선하여, 채제공이 [[오광운]]의 뒤를 이어 남인 정파를 주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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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이민정,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75 이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ref>김지영,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95 채제공]",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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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의 생애===
===채제공의 정계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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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의 성장과 학문활동====
====영조대의 정계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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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은 1501년(연산군 7) 11월 25일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에서 태어났다. 이황이 태어난지 7개월 만에 부친 [[이식]]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어머니 춘천 박씨의 손에서 자랐다. 12살부터 숙부인 [[이우]]에게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23살때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혼란스러운 분위기에 2달만에 성균관을 떠나게 되나, 여기서 [[김인후]]와의 친분을 쌓는다. 이황은 33세인 1533년(중종 28)에 다시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그 해 가을 [[김안국]]과의 친분을 쌓는다.  
채제공은 1743년(영조 19)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영조의 눈에 들어 주요 관직을 역임하고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753년에 호서암행어사로 [[균역법]]에 대한 백성의 여론을 파악하였고, [[홍문관]]의 관리로 경연에 참여하였다. 1758년  『[[열성지장|열성지장(列聖誌狀)]]』과 『[[어제상훈보편|어제상훈보편(御製常訓補篇)]]』의 교정 및 편차에 참여한 공로로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1768년에는 『[[어제속집경당편집]]』의 편찬을 담당하였다. 체제공은 1770년 병조판서에 제수된 후 수년 간 호조판서와 병조판서에 번갈아 제수되었다. 이 때에는 약방제조의 일도 겸하여 영조의 건강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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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이민정,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75 이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ref>김지영,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95 채제공]",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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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의 정계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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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은 1534년(중종 29)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사화가 이어지는 혼란스러운 시기였기 때문에, 이황의 벼슬길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황은 1521년(중종 16) 21세 때 결혼한 허씨가 1527년 세상을 떠나자 1529년 안동 권씨에게 다시 장가를 들었다. 이황의 장인인 [[권질|권질(權礩)]][[권전|정언(正言) 권전(權磌)]]의 형이었는데, 권전은 기묘사림으로 [[기묘사화]] 당시 파직된 후 [[안처겸|안처겸(安處謙)]]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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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이민정,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75 이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정조대의 정계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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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5년에는 호송관(護送官)에 임명되어 왜노(倭奴)를 동래(東萊)까지 이송하기도 했는데, 당시 여주(驪州)의 목사로 있던 [[이순|이순(李純)]][[여주 신륵사|신륵사(神勒寺)]]에서 노닐며 『[[황극경세서|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와 『[[참동계|참동계(參同契)]]』에 대해 논하기도 하였다. <ref>이민정,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75 이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1776년 국장도감제조로서 영조의 [[행장]]·[[시장]]·[[어제]]·[[어필]]의 편찬 작업과 영조실록 편찬사업에 참여하였다. 사도세자의 일이나 세손 시절 왕위 계승 또는 추숭 문제에 개입했던 [[김상로|김상로(金尙魯)]], [[이덕사]], [[조재한]] 등을 처단할 때 형조판서 겸 판의금부사로서 옥사를 처결하였다. 1780년(정조 4) [[홍국영|홍국영(洪國榮)]]의 세도가 무너지고  소론계 공신인 [[서명선|서명선(徐命善)]]이 주도하는 정권이 들어섰다. 채제공은 홍국영과의 친분, 사도세자의 추숭을 주장하는 무리들과 연계되어 있다는 죄목 등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788년(정조 12)에 정조가 친필로 채제공을 우의정에 발탁하였다. 1789년 좌의정이 되어 [[사도세자(장조)]]의 묘소를 옮겨 [[현륭원]]으로 봉하는 일을 주도하여 처리하였다. 우의정 [[김종수|김종수(金鍾秀)]]와 함께 탕평정국을 주도했다. <ref>김지영,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95 채제공]",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1793년에 잠깐 영의정에 임명되었을 때는, 전일의 영남만인소에서와 같이 사도세자를 위한 단호한 토역(討逆)을 주장하여 이후 노론계의 집요한 공격이 야기되기도 하였다. 그 뒤는 주로 [[화성행궁]]의 건설을 담당하다가 1798년 사직하였다.
 
<ref>박광용,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5646 채제공]",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채제공의 교유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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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8년(명종 3) 이황은 외직(外職)을 요청하여 단양군수(丹陽郡守)로 부임하였다. 10월 넷째 형 [[이해]]가 충청감사로 부임하면서 [[상피제|상피제(相避制)]]로 인해 풍기군수(豊基郡守)로 옮겨갔다. 1549년 12월에는 [[백운동서원|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 편액과 서적을 내려줄 것을 감사에게 청하였다.<ref>이민정,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75 이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채제공은 남인들이 참여하는 시회를 열어 친목을 도모하였다. [[목만중]], [[유하원]], [[이정운]], [[이익운]], [[정약용]] 등이 여기에 참석하였다. 1788년 정조가 특명으로 채제공을 우의정에 임명한 후에는 때때로 용산의 [[시안정]]에서 모여 지인들과 시를 지으며 회포를 풀었다. 채제공이 남인들의 화합을 위해 노력했지만 [[이승훈]], [[이가환]], [[정약종]] 등이 [[서학]]에 기울면서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채제공은 서학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정학(正學)을 올바로 세우고 남인들의 불우한 처지가 개선된다면 저절로 서학에 기울었던 젊은이들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1799년 채제공, 1800년 [[조선 정조|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목만중]]과 [[채홍리]] 등은 [[조선 순조|순조]] 초년 서학과 관련된 문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처벌에 앞장서게 된다. 채제공도 이들 서학과 관련된 문인들을 양성한 이로 지목되어 생전의 관작을 모두 빼앗겼고 후손들도 영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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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김지영,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95 채제공]",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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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칠정논쟁]][[성학십도]]===
===채제공의 학문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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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은 결국 고향에 은거하면서 지방에서 제자를 기르는 방법을 택하였다. 병으로 감사에게 수차례 사직 의사를 표명하고 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고향으로 돌아왔다. 1550년에 신진학자 [[기대승]]에게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대해 논변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사단칠정논쟁]]’이다. [[조선 명종|명종]]은 이황을 계속 중앙정계로 복귀시키려 하였지만, 한번 마음을 굳힌 이황은 좀처럼 다시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조선 선조|선조]] 또한 이황을 깊게 사모하여 수차례 벼슬을 내렸지만 이황은 나아가지 않았다. 대신 그는 1568년(선조 1) 8월 「무진육조소」를 올려 ‘계통을 중히 하여 인효(仁孝)를 온전히 할 것’, ‘참소하고 이간하는 것을 막아서 양궁을 친하게 할 것’, ‘성학(聖學)을 독실히 하시어 정치의 근본으로 삼을 것’, ‘도덕과 학술을 밝혀서 인심을 바르게 할 것’, ‘심복(心腹)에게 맡기셔서 이목(耳目)을 통하게 할 것’, ‘성심으로 몸을 닦고 살펴서 하늘의 사랑을 받게 할 것’을 간하였다. 이어 12월에는 성군이 되기 위한 학문의 원리를 열 가지 도설로 정리한 『 [[성학십도|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올려 새로운 임금에게 거는 기대를 드러냈다. <ref>이민정,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75 이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채제공은 문숙(文肅)이라는 시호가 보여주듯이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고 문학에 뛰어났던 다섯 명의 남인 중 하나로 일컬어졌다. [[이황]]-[[정구]]-[[허목]]-[[이익]]으로 이어지는 남인 학맥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정통 주자학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18세기 조선의 여러 적체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힘썼고 특히 부세 제도 운영상의 문제를 개선하고, 국가 재정을 충실하게 하는 방안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사족 중심의 신분질서와 적서의 차별 등 기왕의 질서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다. 순조 때 채제공과 정조대 진출했던 남인 대부분이 축출된 후 후손들이 영락하면서 채제공이나 그의 문인들의 기록들이 유실될 위기에 처했다. 그나마 채제공의 문집인 [[번암집]] 59권이 정조의 명에 의해 간행되어 채제공 뿐 아니라 영조와 정조시대 주요 남인 지식인, 정치가들의 활동을 전할 수 있었다. 순조대 [[유태좌|유태좌(柳台佐)]]가 청양(靑陽)에 영각(影閣)을 세워 채제공을 기념하기도 했다. 1965년 충청남도 부여에 [[홍가신|홍가신(洪可臣)]]·[[허목]]·[[체제공]]을 모시는 [[도강영당|도강영당(道江影堂)]]이 세워졌다.  
+
===은퇴와 [[도산서원]]===
<ref>김지영,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95 채제공]",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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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0년(명종 5) 2월 비로소 퇴계(退溪) 서쪽에 자리를 잡았다. 1559년(명종 14)에는 [[도산서원|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강학에 본격적으로 힘쓰기 시작하였다. 이황은 도산서당을 중심으로 강학활동을 계속하다 1570년(선조 3) 12월 지병이 악화되자 주변을 정리한 후 세상을 떠났다. [[조선 선조|선조]]는 이황이 병환 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내의원]]으로 하여금 약을 보내 구원하게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이황의 죽음이 전해지자 애도하는 뜻으로 3일 동안 정사를 폐할 것을 명하였으며, 영의정의 예에 따라 장사지내도록 하였다. 1572년에 이황의 위패를 [[상덕사]]에 모실 것을 결정하였으며, 그 2년 뒤에는 지방 유림의 공의로서 사당을 지어 위패를 봉안하였고, 이황이 강학활동을 하던 도산서당에 전교당과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하였다. 이 서원은 1575년(선조 8)에 [[한호|한호(韓濩)]]가 쓴 ‘ [[도산서원|도산서원(陶山書院)]]’이란 편액을 하사받았으며, 이후 영남유학의 총본산으로 인정받았다. <ref>이민정,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75 이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지식 관계망==
 
==지식 관계망==

2017년 8월 13일 (일) 00:32 판

이황(李滉)
"이황", 표준영정, 『한민족정보마당』online, 한국문화정보원.
대표명칭 이황
한자표기 李滉
생몰년 1501-1570
본관 진보(眞寶)
시호 문순(文純)
퇴계(退溪), 퇴도(退陶)
경호(景浩)
시대 조선
대표저서 성학십도, 심경후론, 주자서절요
대표직함 풍기군수, 성균관대사성, 단양군수, 대제학
이식
이식 처 춘천 박씨



정의

조선후기의 문신·학자로 연산군선조대의 인물이다. 인간 심성론에 대한 연구와 강학을 통해 조선 성리학(性理學)의 수준을 격상시킨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내용

이황의 가정환경

이황은 무신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황의 할아버지인 이계양(李繼陽)은 소과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더 이상 과거 합격에 뜻을 두지 않고 시골에 은거하여 후손을 가르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이계양의 첫째아들이자 이황의 부친인 이식(李埴)도 학문이 뛰어났다. 동생 이우(李堣)와 함께 학자들에게 칭송받았으며, 특히 박학다식함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우는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좌랑(吏曹佐郞), 사간원 사간(司諫院 司諫) 등을 역임하였으며, 중종반정(中宗反正) 당시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이 되었다. 이후 호조참판(戶曹參判),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이우는 아버지를 일찍 여읜 이황에게는 아버지이자 스승의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했다. [1]

이황의 생애

이황의 성장과 학문활동

이황은 1501년(연산군 7) 11월 25일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에서 태어났다. 이황이 태어난지 7개월 만에 부친 이식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어머니 춘천 박씨의 손에서 자랐다. 12살부터 숙부인 이우에게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23살때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혼란스러운 분위기에 2달만에 성균관을 떠나게 되나, 여기서 김인후와의 친분을 쌓는다. 이황은 33세인 1533년(중종 28)에 다시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그 해 가을 김안국과의 친분을 쌓는다. [2]

이황의 정계활동

이황은 1534년(중종 29)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사화가 이어지는 혼란스러운 시기였기 때문에, 이황의 벼슬길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황은 1521년(중종 16) 21세 때 결혼한 허씨가 1527년 세상을 떠나자 1529년 안동 권씨에게 다시 장가를 들었다. 이황의 장인인 권질(權礩)정언(正言) 권전(權磌)의 형이었는데, 권전은 기묘사림으로 기묘사화 당시 파직된 후 안처겸(安處謙)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죽었다. [3]

1535년에는 호송관(護送官)에 임명되어 왜노(倭奴)를 동래(東萊)까지 이송하기도 했는데, 당시 여주(驪州)의 목사로 있던 이순(李純)신륵사(神勒寺)에서 노닐며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와 『참동계(參同契)』에 대해 논하기도 하였다. [4]

1548년(명종 3) 이황은 외직(外職)을 요청하여 단양군수(丹陽郡守)로 부임하였다. 10월 넷째 형 이해가 충청감사로 부임하면서 상피제(相避制)로 인해 풍기군수(豊基郡守)로 옮겨갔다. 1549년 12월에는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 편액과 서적을 내려줄 것을 감사에게 청하였다.[5]

사단칠정논쟁성학십도

이황은 결국 고향에 은거하면서 지방에서 제자를 기르는 방법을 택하였다. 병으로 감사에게 수차례 사직 의사를 표명하고 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고향으로 돌아왔다. 1550년에 신진학자 기대승에게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대해 논변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사단칠정논쟁’이다. 명종은 이황을 계속 중앙정계로 복귀시키려 하였지만, 한번 마음을 굳힌 이황은 좀처럼 다시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선조 또한 이황을 깊게 사모하여 수차례 벼슬을 내렸지만 이황은 나아가지 않았다. 대신 그는 1568년(선조 1) 8월 「무진육조소」를 올려 ‘계통을 중히 하여 인효(仁孝)를 온전히 할 것’, ‘참소하고 이간하는 것을 막아서 양궁을 친하게 할 것’, ‘성학(聖學)을 독실히 하시어 정치의 근본으로 삼을 것’, ‘도덕과 학술을 밝혀서 인심을 바르게 할 것’, ‘심복(心腹)에게 맡기셔서 이목(耳目)을 통하게 할 것’, ‘성심으로 몸을 닦고 살펴서 하늘의 사랑을 받게 할 것’을 간하였다. 이어 12월에는 성군이 되기 위한 학문의 원리를 열 가지 도설로 정리한 『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올려 새로운 임금에게 거는 기대를 드러냈다. [6]

은퇴와 도산서원

1550년(명종 5) 2월 비로소 퇴계(退溪) 서쪽에 자리를 잡았다. 1559년(명종 14)에는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강학에 본격적으로 힘쓰기 시작하였다. 이황은 도산서당을 중심으로 강학활동을 계속하다 1570년(선조 3) 12월 지병이 악화되자 주변을 정리한 후 세상을 떠났다. 선조는 이황이 병환 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내의원으로 하여금 약을 보내 구원하게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이황의 죽음이 전해지자 애도하는 뜻으로 3일 동안 정사를 폐할 것을 명하였으며, 영의정의 예에 따라 장사지내도록 하였다. 1572년에 이황의 위패를 상덕사에 모실 것을 결정하였으며, 그 2년 뒤에는 지방 유림의 공의로서 사당을 지어 위패를 봉안하였고, 이황이 강학활동을 하던 도산서당에 전교당과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하였다. 이 서원은 1575년(선조 8)에 한호(韓濩)가 쓴 ‘ 도산서원(陶山書院)’이란 편액을 하사받았으며, 이후 영남유학의 총본산으로 인정받았다. [7]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채응일 이황 A는 B의 어버이다
이만성 채응일 처 연안이씨} A는 B의 어버이다
채응일 처 연안이씨 채응일 A는 B의 아내이다
강박 이황 A는 B의 스승이다
오광운 이황 A는 B의 스승이다
오필운 오광운 A는 B의 형제이다
채제공 처 동복오씨 이황 A는 B의 아내이다
오필운 채제공 처 동복오씨 A는 B의 어버이다
오필운 강박 A는 B와 교유하였다
이황 승문원 A는 B에 소속된다 1743년
이황 홍문관 A는 B에 소속된다 1753년
이황 열성지장 편찬 A는 B에 참여하였다 1758년
이황 어제상훈보편 편찬 A는 B에 참여하였다 1758년
이황 어제속집경당편집 A는 B에 참여하였다 1768년
이황 국장도감 A는 B에 소속된다 1776년
이황 영조실록 편찬 A는 B를 주도하였다 1776년
이황 현륭원 A는 B와 관련이 있다 1789년
이황 화성행궁 A는 B와 관련이 있다
이황 목만중 A는 B와 교유하였다
이황 유하원 A는 B와 교유하였다
이황 이정운 A는 B와 교유하였다
이황 이익운 A는 B와 교유하였다
이황 정약용 A는 B와 교유하였다
이황 이승훈 A는 B와 교유하였다
이황 이가환 A는 B와 교유하였다
이황 정약종 A는 B와 교유하였다
이황 채홍리 A는 B와 교유하였다
이황 번암집 A는 B를 저술하였다
이황 원행을묘정리의궤 A는 B와 관련이 있다
이황 가체신금사목 A는 B에 언급된다

주석

  1. 이민정, "이황",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2. 이민정, "이황",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3. 이민정, "이황",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4. 이민정, "이황",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5. 이민정, "이황",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6. 이민정, "이황",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7. 이민정, "이황",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 논문
    • 백승호,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의 시사(詩社)활동과 그 정치적 활용」, 『漢文學報』26, 우리한문학회, 2012.
  • 단행본
    • 수원화성박물관, 『번암 채제공의 생애와 활동』, 수원화성박물관,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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