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선정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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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9일 (수) 18:40 판
목차
정의
창덕궁에 있는 전각으로, 왕이 신하인 백관을 만나 국사를 논의하고, 유교 경전 등을 공부하기도 하고, 시험을 보기도 하였으며, 잔치를 베풀기도 한 공식 집무실로 쓰인 편전이다.[1]
내용
역사
창건 당시에 ‘조계청(朝啟廳)’에서 1461년(세조 7)에 궁궐 건물들의 이름을 바꿀 때 ‘정치는 베풀어야 한다.’는 의미로 바뀌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 때 재건하고, 인조반정 때 다시 화재를 당했다가 1647년(인조 25)에 중건되었다. 광해군이 창건한 인경궁 광정전 9칸을 철거해 창덕궁 선정전 9칸을 중건한 것으로 보고 있다. 순조 이후에는 창덕궁 선정전보다는 창덕궁 희정당을 편전으로 사용해 혼전을 모시는 곳으로 사용되었다.[2]
현재
현존하는 궁궐 건물에서 유일하게 청색 기와로 치장한 건물이다. 〈동궐도〉와 현재의 창덕궁 선정전을 비교해보면 마당이 원래보다 동서쪽이 좁아진 상태이고, 창덕궁 선정문도 현재보다 더욱 앞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창덕궁을 개조하면서 창덕궁 선정전의 회랑과 창덕궁 인정전의 회랑에 석축을 높이 쌓고 통로를 만든 뒤 복도 건물을 세워 연결시키면서 이전 제도와 다르게 구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3]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창덕궁 선정전 | 경종 | A는 B의 빈전이다 | |
창덕궁 선정전 | 순조 | A는 B의 신주를 봉안했다 | |
창덕궁 선정전 | 정조 | A는 B의 신주를 봉안했다 | |
창덕궁 선정전 | 효종 | A는 B의 재궁이다 |
시간정보
시간 | 내용 |
---|---|
1641년 5월 4일 | 선정전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
공간정보
시각자료
갤러리
창덕궁 선원전의 청색 기와[4]
영상
주석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이강근, 『한국의 궁궐』, 대원사, 1991.
- 이근도, 『경희궁의 복원과 역사산책』, 도서출판 수서원, 2004
- 이태호, 『그림으로 본 옛 서울』, 서울학연구소, 1995.
- 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1999.
- 장순용, 『창덕궁』, 대원사,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