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 귀신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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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한편 [[조선 명종|명종]] 대에는 귀신사의 승려가 성균관 관원과 충돌하여 한양으로 압송된 일이 발생하였다. 1553년([[조선 명종]] 8) 각종 과거 응시의 예비 심사와 성균관 입학시험에 대한 예비 심사에 관한 소임을 맡고 있었던 성균학유(成均學諭) 유세무(柳世茂)가 절 앞에서 말을 먹이고 절에 들어가 쉬고자 했다. 그러나 귀신사 승려들의 수행을 총책임지는 지음(持音) 소임을 맡고 있었던 승려가 유세무의 멱살을 잡고 가는 대나무로 만든 갓을 찢으며 구타하려 했다. 유세무가 그 이유를 묻자 자신도 높은 작위를 지니고 있다고 하고는 유세무의 하인을 구타하여 머리가 터졌다고 한다.<ref>오경후, "[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4382 귀신사(歸信寺)]",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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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사헌 김주(金澍)가 아뢰기를, | ||
− | 1601년(선조 34) 승려 염화(拈化)·신허(信虛)가 부분 중수를, 1624~1633년 승려 덕기(德奇)가 대대적인 중창을 하여 여래삼존불을 봉안하고 승당·정문·미륵보전·시왕전과 천왕문을 건축하였고, 승려 도헌(道軒)이 나한전을 지었다. 1657년(효종 8) 대웅전을 중수하였다. 1680년(숙종 6) 전각을 중수하였으며, 1707년(숙종 33) 승려 두감이 대웅전을 중수, 1715년(숙종 41)에는 팔상전을 중수하였다. 1823년(순조 23)에는 대적광전을, 1873년(고종 10)과 1884년(고종 21)에는 명부전을 중수하였다. 1934년에는 대적광전 등을 중수한 뒤 다시 귀신사로 명칭을 바꾸었다. | + | "성균 학유(成均學諭) 유세무(柳世茂)가 전주(全州) 귀신사(歸信寺) 앞에서 말을 먹이고 절에 들어가서 쉬려 하였더니, 지음승(持音僧)이 몽둥이를 든 백여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나와서 유세무의 멱살을 잡고 초립(草笠)을 찢으며 구타하려 하였습니다. 유세무가 그 중에게 ‘너는 어찌하여 이런 곤욕을 주는가?’ 하니, 그 중은 ‘네가 문관(文官)이지만 나도 왕작(王爵)이 있다.’ 하고, 세무의 종을 구타하여 머리가 터졌다고 합니다. 신들은 이 말을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감사에게 하서(下書)하여 그 사유를 물어 각별히 치죄(治罪)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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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였다. | ||
+ | |출처="[http://sillok.history.go.kr/id/kma_10803014_001 심연원이 왜인의 수직에 관해 아뢰다]", 명종실록 14권, 명종 8년 3월 14일 경인 1번째기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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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01년(선조 34) 승려 염화(拈化)·신허(信虛)가 부분 중수를, 1624~1633년 승려 덕기(德奇)가 대대적인 중창을 하여 여래삼존불을 봉안하고 승당·정문·미륵보전·시왕전과 천왕문을 건축하였고, 승려 도헌(道軒)이 나한전을 지었다. 1657년(효종 8) 대웅전을 중수하였다. 1680년(숙종 6) 전각을 중수하였으며, 1707년(숙종 33) 승려 두감이 대웅전을 중수, 1715년(숙종 41)에는 팔상전을 중수하였다. 1823년(순조 23)에는 대적광전을, 1873년(고종 10)과 1884년(고종 21)에는 명부전을 중수하였다. 1934년에는 대적광전 등을 중수한 뒤 다시 귀신사로 명칭을 바꾸었다.<ref>"[http://gimje.grandculture.net/Contents?local=gimje&dataType=99&contents_id=GC02600662 귀신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김제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2017년 8월 7일 (월) 13:27 판
김제 귀신사 (金堤 歸信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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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김제 귀신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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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堤 歸信寺 |
주소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112 |
교구정보 | 대한불교조계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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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에 있는 사찰.
내용
귀신사는 의상(義湘)이 창건하여 국신사(國信寺)라고 했던 것에서 비롯된다. 당시의 규모는 짐작할 수 없지만 당대의 대학자인 최치원(崔致遠)이 그의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을 이곳에서 쓴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까지 대사찰로서의 면모를 유지했던 듯하다. 「법장화상전」에는 국신사(國神寺)로 표기되어 있다. 한편 귀신사는 백제 법왕(法王) 때 원당(願堂), 곧 왕실 사찰로 창건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는데, 경내에 있는 석수(石獸)가 백제 왕실의 자복사찰(資福寺刹)에서만 볼 수 있는 석물이라는 견해 때문이다. 또한 조선 후기 고승인 자수무경(子秀無竟)의 「전주무악산귀신사사적사인(全州毋岳山歸信寺事蹟詞引)」에도 절은 백제 왕실의 원당이었다는 글이 있다.[1]
통일신라 말기 철감선사 도윤(澈鑒禪師 道允)이 중창한 뒤 귀신사로 개칭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원명국사 징엄(圓明國師 澄儼)이 중창하였다. 원명국사는 숙종의 넷째 아들로 8세 때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에게 출가하여 1122년(예종 17) 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이 되었으나, 이자겸(李資謙)의 횡포를 보고 귀신사로 들어왔다. 이 무렵에는 구순사(狗脣寺) 혹은 구순사(口脣寺)로 불렸다. 이름이 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는데, 절 주위의 지형이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구순혈형(狗脣穴形)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전하지만 명확한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2]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의 정책 탓인지 초기에 절은 매우 퇴락된 듯하다. 그것은 조선 초기의 문인인 김시습(金時習)이 이 곳을 찾은 뒤 지은 「귀신사허(歸信寺墟)」라는 시문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데, 시 가운데 '탑은 무너지고 비석은 끊어져 있다'라는 내용이 있어 15세기 당시 절의 상황을 짐작케 한다.[3]
煙埋秋草夕陽中 가을풀 가득한 곳 석양 중에 와보니
獨立空山思不窮 홀로선 빈 산에서 생각은 끝없어라 壞塔已無花雨瑞 탑은 무너져 꽃도 없는 곳에 단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斷碑猶帶薜蘿叢 부서진 비석 위에는 들풀이 엉켜 있네 幾年成敗隨流水 얼마간의 성패야 흘러가는 물같은 것 千古關河送去鴻 옛날에도 관하에서 기러기를 날려 보내지 않았나 世上興亡皆若此 세상의 흥망은 모두 이와 같을까 不須懷糈問天公 기다리지 못하고 천공에게 물어보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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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원문: "歸信寺墟", 梅月堂詩集卷之十一 詩○遊湖南錄, |
한편 명종 대에는 귀신사의 승려가 성균관 관원과 충돌하여 한양으로 압송된 일이 발생하였다. 1553년(조선 명종 8) 각종 과거 응시의 예비 심사와 성균관 입학시험에 대한 예비 심사에 관한 소임을 맡고 있었던 성균학유(成均學諭) 유세무(柳世茂)가 절 앞에서 말을 먹이고 절에 들어가 쉬고자 했다. 그러나 귀신사 승려들의 수행을 총책임지는 지음(持音) 소임을 맡고 있었던 승려가 유세무의 멱살을 잡고 가는 대나무로 만든 갓을 찢으며 구타하려 했다. 유세무가 그 이유를 묻자 자신도 높은 작위를 지니고 있다고 하고는 유세무의 하인을 구타하여 머리가 터졌다고 한다.[4]
대사헌 김주(金澍)가 아뢰기를,
"성균 학유(成均學諭) 유세무(柳世茂)가 전주(全州) 귀신사(歸信寺) 앞에서 말을 먹이고 절에 들어가서 쉬려 하였더니, 지음승(持音僧)이 몽둥이를 든 백여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나와서 유세무의 멱살을 잡고 초립(草笠)을 찢으며 구타하려 하였습니다. 유세무가 그 중에게 ‘너는 어찌하여 이런 곤욕을 주는가?’ 하니, 그 중은 ‘네가 문관(文官)이지만 나도 왕작(王爵)이 있다.’ 하고, 세무의 종을 구타하여 머리가 터졌다고 합니다. 신들은 이 말을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감사에게 하서(下書)하여 그 사유를 물어 각별히 치죄(治罪)하소서."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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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심연원이 왜인의 수직에 관해 아뢰다", 명종실록 14권, 명종 8년 3월 14일 경인 1번째기사, |
1601년(선조 34) 승려 염화(拈化)·신허(信虛)가 부분 중수를, 1624~1633년 승려 덕기(德奇)가 대대적인 중창을 하여 여래삼존불을 봉안하고 승당·정문·미륵보전·시왕전과 천왕문을 건축하였고, 승려 도헌(道軒)이 나한전을 지었다. 1657년(효종 8) 대웅전을 중수하였다. 1680년(숙종 6) 전각을 중수하였으며, 1707년(숙종 33) 승려 두감이 대웅전을 중수, 1715년(숙종 41)에는 팔상전을 중수하였다. 1823년(순조 23)에는 대적광전을, 1873년(고종 10)과 1884년(고종 21)에는 명부전을 중수하였다. 1934년에는 대적광전 등을 중수한 뒤 다시 귀신사로 명칭을 바꾸었다.[5]
관련문화유산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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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주석
- ↑ 사찰문화연구원, "귀신사", 『전통사찰총서 8 - 전북의 전통사찰IV』, 사찰문화연구원, 2008, 94-95쪽.
- ↑ "귀신사",
『디지털김제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사찰문화연구원, "귀신사", 『전통사찰총서 8 - 전북의 전통사찰IV』, 사찰문화연구원, 2008, 95쪽.
- ↑ 오경후, "귀신사(歸信寺)",
『조선왕조실록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귀신사",
『디지털김제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사찰문화연구원, "귀신사", 『전통사찰총서 8 - 전북의 전통사찰IV』, 사찰문화연구원, 2008, 94-1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