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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7일 (월) 13:14 판
김제 귀신사 (金堤 歸信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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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김제 귀신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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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堤 歸信寺 |
주소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112 |
교구정보 | 대한불교조계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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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에 있는 사찰.
내용
귀신사는 의상(義湘)이 창건하여 국신사(國信寺)라고 했던 것에서 비롯된다. 당시의 규모는 짐작할 수 없지만 당대의 대학자인 최치원(崔致遠)이 그의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을 이곳에서 쓴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까지 대사찰로서의 면모를 유지했던 듯하다. 「법장화상전」에는 국신사(國神寺)로 표기되어 있다. 한편 귀신사는 백제 법왕(法王) 때 원당(願堂), 곧 왕실 사찰로 창건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는데, 경내에 있는 석수(石獸)가 백제 왕실의 자복사찰(資福寺刹)에서만 볼 수 있는 석물이라는 견해 때문이다. 또한 조선 후기 고승인 자수무경(子秀無竟)의 「전주무악산귀신사사적사인(全州毋岳山歸信寺事蹟詞引)」에도 절은 백제 왕실의 원당이었다는 글이 있다.[1]
통일신라 말기 철감선사 도윤(澈鑒禪師 道允)이 중창한 뒤 귀신사로 개칭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원명국사 징엄(圓明國師 澄儼)이 중창하였다. 원명국사는 숙종의 넷째 아들로 8세 때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에게 출가하여 1122년(예종 17) 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이 되었으나, 이자겸(李資謙)의 횡포를 보고 귀신사로 들어왔다. 이 무렵에는 구순사(狗脣寺) 혹은 구순사(口脣寺)로 불렸다. 이름이 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는데, 절 주위의 지형이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구순혈형(狗脣穴形)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전하지만 명확한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2]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의 정책 탓인지 초기에 절은 매우 퇴락된 듯하다. 그것은 조선 초기의 문인인 김시습(金時習)이 이 곳을 찾은 뒤 지은 「귀신사허(歸信寺墟)」라는 시문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데, 시 가운데 '탑은 무너지고 비석은 끊어져 있다'라는 내용이 있어 15세기 당시 절의 상황을 짐작케 한다.[3]
煙埋秋草夕陽中 가을풀 가득한 곳 석양 중에 와보니
獨立空山思不窮 홀로선 빈 산에서 생각은 끝없어라 壞塔已無花雨瑞 탑은 무너져 꽃도 없는 곳에 단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斷碑猶帶薜蘿叢 부서진 비석 위에는 들풀이 엉켜 있네 幾年成敗隨流水 얼마간의 성패야 흘러가는 물같은 것 千古關河送去鴻 옛날에도 관하에서 기러기를 날려 보내지 않았나 世上興亡皆若此 세상의 흥망은 모두 이와 같을까 不須懷糈問天公 기다리지 못하고 천공에게 물어보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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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원문: "歸信寺墟", 梅月堂詩集卷之十一 詩○遊湖南錄, |
또한 명종 대에는 성균관 관원과 충돌하여 귀신사의 승려가 한양으로 압송된 일이 발생하였다. 1553년(조선 명종 8) 각종 과거 응시의 예비 심사와 성균관 입학시험에 대한 예비 심사에 관한 소임을 맡고 있었던 성균학유(成均學諭) 유세무(柳世茂)가 절 앞에서 말을 먹이고 절에 들어가 쉬고자 했다. 그러나 귀신사 승려들의 수행을 총책임지는 지음(持音) 소임을 맡고 있었던 승려가 유세무의 멱살을 잡고 가는 대나무로 만든 갓을 찢으며 구타하려 했다. 유세무가 그 이유를 묻자 자신도 높은 작위를 지니고 있다고 하고는 유세무의 하인을 구타하여 머리가 터졌다고 한다.[4]
관련문화유산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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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주석
- ↑ 사찰문화연구원, "귀신사", 『전통사찰총서 8 - 전북의 전통사찰IV』, 사찰문화연구원, 2008, 94-95쪽.
- ↑ "귀신사",
『디지털김제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사찰문화연구원, "귀신사", 『전통사찰총서 8 - 전북의 전통사찰IV』, 사찰문화연구원, 2008, 95쪽.
- ↑ 오경후, "귀신사(歸信寺)",
『조선왕조실록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사찰문화연구원, "귀신사", 『전통사찰총서 8 - 전북의 전통사찰IV』, 사찰문화연구원, 2008, 94-1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