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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27일 (목) 14:10 판
한수(韓脩) | |
대표명칭 | 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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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韓脩 |
생몰년 | 1333년-1384년 |
본관 | 청주(淸州) |
시호 | 문경(文敬) |
호 | 유항(柳巷 |
자 | 맹운(孟雲) |
시대 | 고려 |
대표저서 | 유항집(柳巷集) |
정의
고려 말의 문신.
내용
1347년(충목왕 3) 15세의 나이로 과거에 합격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충정왕 때 정방(政房: 고려 무신정권기에 최우가 자기 집에 설치하여 인사행정을 취급한 기관)의 필도치(必闍赤: 서기 일을 맡은 관원)에 임명되었으며, 왕이 왕위를 내놓고 강화로 쫓겨날 때 시종해 따라갔다.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안동으로 피난할 때 호종했다. 1365년 신돈(辛旽)이 집권하자, 왕에게 신돈이 바른 사람이 아니라며 멀리할 것을 아뢰었다가 예의판서(禮儀判書)로 밀려난 다음 곧 관직에서 물러났다. 1371년 신돈이 주살되자 왕이 다시 불러 이부상서(吏部尙書)·수문전학사(修文殿學士)로 발탁했으며, 곧 승선(承宣: 왕명의 출납을 관장한 관직)에 임명됨으로써 전선(銓選: 인사행정)을 관장하게 되었다. 공민왕 시해에 관여한 한안(韓安)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일시 유배되었으며, 1378년 돌아와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지고 수충찬화공신(輸忠贊化功臣)이 되었다. 이어 청성군(淸城君)에 개봉(改封)되고 1383년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에 이르렀다.[1]
이색(李穡)과는 일찍부터 교분이 깊었고, 또한 『유항집(柳巷集)』이라는 시집을 남겼다고 한다. 『동문선(東文選)』에 「영모정행(永慕亭行)」등 시 여러 수가 수록되어 있고, 그 밖의 책에서도 그의 시문을 확인할 수 있다.[2]
비문의 서자
한수(韓脩)는 초서(草書)와 예서(隸書)에 능하여 당대의 명필로 이름이 있었다. 관련 비문으로는 노국대장공주묘비(魯國大長公主墓碑), 회암사지공대사탑비(檜巖寺指空大師塔碑), 여주 신륵사보제선사사리석종비(神勒寺普濟禪師舍利石鍾碑),[3] 광통보제선사비(廣通普濟禪寺碑) 등이 있다.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 한수 | A는 B가 비문을 썼다 | |
광통보제선사비 | 한수 | A는 B가 비문을 썼다 | |
양주 회암사 지공선사부도비 | 한수 | A는 B가 비문을 썼다 | |
한수 | 이색 | A는 B와 교유하였다 |
주석
- ↑ "한수",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윤용혁, "한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응백, 김원경, 김선풍, 『국어국문학자료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 온라인 참조: "한수", 국어국문학자료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